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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들소리'를 전승하는 자인계정들소리보존회자인계정 들소리는 경산시 자인면 일대에서 농사철에 부르던 농요(農謠)로 계정숲을 중심으로 이 지역에 뿌리깊은 농업노동요로 이어져 왔다. 자인 계정들 소리는 자인면 일대에서 주로 농사철에 부르던 들소리(農謠)의 집성이다. 자인면 일대는 '신라의 서촌'이라 불리던 유서 깊은 곡창이며 민속예능의 보고이다. 계정들소리도 이 가운데서 형성된 뿌리 깊은 농업 노동요라 할 수 있다. 계정들의 가운데 자인이 위치하고 이곳에 자인단오굿의 '한장군놀이'로 유명한 계정숲이 있다. 계정숲을 중심으로 오랜 역사를 가진 자인 단오굿이 해마다 단오절에 벌어진다. 계정숲에는 지금도 자인 단오굿에 관련되는 한장군 사당과 묘가 있고, 그 아래로부터 펼쳐지는 들판을 계정들이라 한다. 이 계정들을 중심으로 하여 불리어지던 다양한 농업 노농요를 수집하고 재구성한 것이 바로 '자인 계정들소리'이다. 제3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98)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자인 계정들 소리'는 후창자 24명이 추가되어 뒷소리의 발음이 더 씩씩하고 장(壯)하다. 계정들 소리의 소리꾼들은 선창 6명과 후창74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상도 민요의 특징인 메나리(산유화)제로 구성된 역동적인 소리로 풍년을 기리는 `들지신 밟기`로 시작돼 `모찌기 소리`, `모심기 소리`, `논매기 소리`, `메타작 소리`, `방아타령`으로 이어진다. 이와함께 산에 나무를 하러가거나 들에 풀을 베러 가면서 넋두리로 부르는 `어사잉어`와 못둑과 밭둑을 쌓을 때, 돌과 나무를 운반할 때 부르는 `목도 소리`와 `망깨 소리`, `보역사 소리`, `칭칭이` 등 모두 열한 개의 소리를 풍물장단에 흥겹게 춤을 추며 부른다. 다른 지역의 대부분 농요는 선율이 거의 같은 경우가 많지만 자인계정 들소리는 소리마다 각기 다른 선율로 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더욱이 대부분의 소리가 3박으로 흥청거리는 멋을 곁들이고 있으며 목도 소리와 타작 소리만은 2박으로 씩씩하고 힘차다. 풍년을 기리는 '시진밟기' 산에서 나무를 하거나 풀 베러 갈 대 넔두리로 불렀던 '어사잉이'(어사용)이가 있고, 둑을 쌓을 때나 산판을 할 때 나무둥글이나 돌을 운반하면서 부르는 '목도소리', 못둑을 다지는 '망깨소리', 보(洑)의 물길을 트는 보가래질을 할 때의 '보역사(洑役事)소리', 그리고, 본격적인 나락농사를 시작하면서 부르는 '모찌기소리', 모를 심으면서 부르는 '모심기소리', 논 맬 때 부르는 '논매기소리', 한 톨의 곡식이라도 알뜰히 거두려는 '타작소리'가 있다. 풍년을 기리는 '방아타령'과 신나고 흥겨운 '칭칭이'의 풍물장단에 흥겹게 춤을 추며 상일꾼을 소에 거꾸로 태워 마을로 돌아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산 자인계정숲 일원에서 개최되는 경산 자인단오제 첫날 호장장군 행렬과한장군대제를 시작으로 첫날은 국가무형문화재 한장군대제, 국가무형문화제 자인단오 큰굿, 경북무형문화재 보안농악, 경북무형문화재 계정들소리, 국가무형문화재 여원무,국가무형문화재 팔광대 공연등과 개막식이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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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무형유산 우수 이수자에 활동 장려금 신규지급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은 국가무형유산 이수자에 대한 안정적인 전승활동 지원을 위해 올해부터 우수 이수자를 대상으로 전승활동 장려금(월 50만 원)을 새롭게 지원한다. 그간「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가무형유산전승자 중 보유자, 보유단체, 전승교육사에게는 전승활동에 필요한 전수교육지원금이 매달 지급되었으나, 전체 전승자의 95%(약 7천여 명)를차지하는 이수자에게는 별도의 지원금이 없어 전승활동에 매진하는 데경제적인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국립무형유산원에서는 ‘우수 이수자 전승활동 장려금 지원’ 정책을 새롭게 마련하여 올해부터 추진하며, 장려금 지원 대상은 국가무형유산이수자가 된 후 전승활동 실적(3년 이상)이 우수한 사람 중에서 해당 종목의보유자, 보유단체 및 전수교육학교의 추천을 받은 사람이다. 이 중 국립무형유산원의 검토를 거쳐 1월 중 270여 명을 최종 선정할 예정이다. 우수 이수자는 2년 주기로 선정되며, 올해 1월 말부터 2년간 매월 50만 원의장려금을 지급받게 되며, 해당 종목의 전승활동에 필요한 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와 함께, 국가무형유산 보유자와 보유단체에 지급되는 전수교육지원금도상향되어, 보유자는 월 150만 원에서 200만 원으로, 보유단체는 월 360만 원에서 380만 원(자율전승형 보유단체 월 550→580만 원)으로 각각 인상된 지원금을 받게 된다. 국가무형유산 우수 이수자 장려금 지원, 월정 전승지원금과 관련 자세한 사항은 국립무형유산원 전승지원과(063-280-1441)로 문의하면 안내받을 수 있다.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은 앞으로도 우리 국민의 정신적인 가치가담겨진 소중한 국가무형유산을 후대에 온전히 전승함과 더불어 미래자산으로서 그 가치를 더해 갈 수 있도록 전승지원 확충에 노력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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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탈놀이 딴소리판', 탈놀이와 판소리 만남강릉단오제전수교육관은 오는 23일 오후 7시 30분 강릉단오제전수교육관 공연장에서 기획공연 '광대탈놀이 딴소리 판'을 개최한다. '광대탈놀이 딴소리 판'은 누구나 다 아는 뻔한 판소리 이야기로 뛰어들어 세상 별것 아니라는 주제를 드러내며 익살스러운 탈놀이와 딴소리 허다한 판소리로 채운 신명 나는 무대를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판소리 다섯마당(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 홍보가) 속 여전히 존재하는 세상의 편협함을 가장 낮은 자리에서 바라보는 광대들의 '딴소리'로 판을 깨고 비틀며 엉뚱한 상상과 재치 가득한 무대로 펼쳐진다. 또한, 광대들의 탈춤, 풍물진법, 재담 등으로 흥을 주고받으며 연희자와 관객이 구분 없이 서로 어울려 노는 흥겨운 무대와 익살스럽지만 역동적이고, 풍자와 해학이 있지만 여백이 있는 광대들의 춤사위를 통해 우리의 삶을 해학적이고 유쾌한 탈놀음으로 위로한다. 공연단체인 연희집단 The광대(대표 안대천)는 풍물, 탈춤, 남사당놀이 등 한국의 민속예술을 전공한 예인들로 구성된 예술단체로 국내외에 우리 연희의 신명과 멋을 널리 알리고 있다. 아울러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하고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킨 옛날 광대들의 예술과 삶의 자취를 기억하며 개인이 명인으로 성장하는 동시에 시대와 함께 가는 예술가로 새로운 광대의 모습을 정립해나가고자 한다. 이번 공연은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와 강릉시가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하며 "2023년 문예회관과 함께하는 방방곡곡문화공감사업"을 통해 강릉단오제전수교육관, 연희집단The광대가 주관해 개최한다. 허동욱 문화유산과장은 "강릉단오제의 관노가면극과 함께 202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인 탈춤이 탈놀음과 판소리가 만나 재치있게 재해석된 이번 공연으로 종합예술인 우리 한국 탈춤의 또 다른 면모를 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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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근대 전반기 대구지역춤의 전승 인맥(人脈) 고찰Ⅰ. 대구지역춤의 생태문화적 환경 대구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남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두대간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더위는 심하고 기간도 길고 봄이 짧으면서 계절의 변화가 급속한 전형적인 대륙성기후를 보이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배경으로 형성된 영남북부의 교통, 문화, 교육의 중심지이다.또한 대구인들은 뛰어난 적응력과 강안한 개척정신, 의리와 결단력을 매우 중시하여 든든한 느낌이 든다. 배타적이고 무뚝뚝한 점도 있지만 애교있는 여성도 많고, 대도시라 그런지 덜 폐쇄적이고, 전통적으로 보수성과 선비정신이 높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지리와 기후환경적으로 대구지역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분지기후(盆地氣候)를 이루고 있어 분지 내부의 복사열 등의 더운 기온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여 대체로 비가 적고 매우 건조하며, 여름은 무덥고 겨울은 덜 추운 지역이다.또한 역사문화적으로 넓게는 신라문화권에 속하며, 행정적으로는 영남북부문화권, 민속적으로는 백중문화권(단오 추석문화권), 내륙문화권이라는 광역적 성향도 기저에 깔려 있다. 따라서 대구지역만의 독특한 춤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켜 미시적으로는 대구지역춤이며, 광역적으로는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고 있으면서, 거시적으로 한국춤계의 중요한 춤문화권과 영향력으로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근대시기 6.25한국동란으로 일시적이나마 대구에 중앙국립극장이 옮겨지면서 수많은 예술인과 무용들이 집중되는 현상으로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번 대구에서 펼쳐지는 세계안무페스티벌과 안무학술포럼을 통해 대구지역춤의 역사와 춤인물과 인맥과 현황을 고찰함으로써 대구지역춤의 역사에만 머물지 않고 한국춤의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고 미래춤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조선조 전통문화시대를 지나 1900년대 초부터 1960년대 이전까지 서구문명과 외래문화의 범람시기에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소멸되어가던 전통춤 전승에 수구적(守舊的)이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춤인맥을 고찰하고, 또한 시대조류에 따라 새롭게 형성되는 국제적인 근대춤 정착에 헌신한 춤인맥을 살펴 대구지역춤의 전승과 무용사적 의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만 심도있는 연구가 아닌 포럼이기에 아쉽지만 개괄적인 고찰에 머물 것이며, 연구방법은 문헌연구로 그간 대구춤과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과 평문 등을 일별하여 요약문을 작성하였다. 대구지역춤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 등은 한국교육학술정보원(RISS)을 검색어를 통한 문헌 내용과 필자 소장문헌을 중심으로 고찰 정리하였다. 또한 대구무용계의 여명기를 개척한 1세대를 중심으로 뒤를 이은 2세대에 한하여 20세기 초중반기(개화기부터 1960년대까지) 무용인물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Ⅱ. 대구지역춤의 근대사적 배경 전통시대(조선조)의 춤은 대체로 궁중춤(정재, 일무), 민속춤(예인춤, 민간춤), 종교의식춤(불교춤, 무속춤) 등으로 전승되어 왔지만 우선 관심의 대상은 기방춤으로 궁중과 선상기(選上妓)로 활동하던 지방관기 전승의 교방춤과 기방춤으로 전승되어왔다. 대한제국시대와 한일합방의 급변속에서도 20세기(1900년대) 근대초기 관기제도의 폐지와 기생조합과 권번의 등장과 궤를 같이하며 경향 각지에서 나름의 전승체계와 색다른 공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전개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기생조합은 1904년 10월 10일 일본공사관의 제3호 경성관령으로 비롯된 창기 창녀의 사회적 공식화부터 비롯된다. 궁내부 제도 개편의 일환으로 시행된 1905년 여악(女樂)의 폐지, 1908년 7월에 ‘향사이정조칙(享祀釐正詔勅)’으로 관기들이 소속된 태의원(太醫院)의 의녀(醫女)나 침선비(針線婢) 등이 해체되면서 관기제도가 폐지되고 그해 8월 24일에 장례원 장악과가 해체되었다. 아울러 1908년 9월 15일 기생 및 창기 단속령과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 제정 등에 의해 우리나라에 적용한 일제의 공창화(公娼化) 정책에 의해 설립된 전국의 기생과 창기들의 동업조합이 곧 ‘기생조합’이다. 한편 기생조합소는 기업(妓業)을 주관하는 사업체 및 운영 사무실을 지칭하는 것인데, 초기에는 기생조합 또는 창기조합이라고 불렸다가 1917년경부터 일본식으로 ‘권번(券番)’이라 바뀌었다. 한국의 근대화의 물결과 근대춤의 시작은 대체로 1900년 전후로 나타난 세계사적 물결과 주변국과의 교류에서 비롯되었으며, 국내적으로도 조선시대 말 갑오경장(1894년)과 대한제국시대에 거스를 수 없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문화조류가 파급되면서부터이다. 1902년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경성에 설립되어 그해 12월 4일부터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가 공연되었다. 그후 1907년 광무대(光武臺), 단성사(團成社), 연흥사(演興社), 1908년 장안사(長安社) 등 극장이 개설되었고, 광무대에서는 관기(官妓)의 가인전목단·검무(劍舞)·남무(男舞)·무고(舞鼓)·무동·성진무(聖眞舞)·승무(僧舞)·시사무(矢射舞)·이화무(梨花舞)·전기광무(電氣光舞)·지구무(地球舞)·한량무(閑良舞)등과 같은 춤 종목은 활동사진과 함께 광무대의 무대에서 공연됐다. 1915년 결성한 경성구파배우조합(京城舊派俳優組合)과 손잡고 광무대 7주년기념공연으로 새로 선보인 고구려무(高句麗舞)·공막무(公莫舞)·첨수무(尖袖舞) 등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청년학생음악단 내한공연(1921), 이시이 바쿠 내한공연(1926), 최승희의 <세레나데> 공연(1927), 배구자의 <아리랑> 공연(1928) 등으로 무용공연 등이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면서 한국의 근대춤이 이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후기 대구 관기들의 활동 배경을 살펴보면,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대구지역에 감영 설치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경주-상주로부터 이어져 온 감영이 옮겨오게 되었다. 곧 1601년(선조34년)에 경상감영이 대구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구는 경상도의 중심적 거점도시로 변모되면서 많은 국가적 지역적 행사가 많아졌다. 경상감영과 대구부(大邱府)에 소속된 관기(官妓)들의 공적(公的)인 악가무 활동이 활성화 되었던 것이다. 경상도와 관련되는 국가적 행사는 경상감영이 주관하여 이루어졌고, 대구와 관련되는 지역적 행사는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이 도맡아 행사를 치루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는 같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중구 포정동에 위치한 경상감영공원(전 중앙공원) 일대이다. 영조 43년(1736년)에 작성된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에는 경상감영의 부속건물로 교방과 취고수방(吹鼓手房)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1768년에 발간된 『대구읍지大丘邑誌』1)에 의하면, 경상감영 교방(敎坊)에는 41명의 예기(藝妓)가 있었고, 대구부에는 31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또한 1888년에 자인현감 오횡묵(吳宖黙)이 적은 『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에 의하면, 경상감영 관하방(觀下房)에는 21명의 기생이 있으며, 대구부에는 17명의 기생이 영영교청(嶺營敎廳)에 소속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은 악기, 노래, 춤 등 각종기예를 익혀 각종 공적인 연회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상도 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대구부의 교방기생 31명과 관노 40명, 대구감영의 교방기생 35명과 관노 81명의 기록이 보인다. 그후 대구기생 향선(香仙)을 비롯한, 남수(藍水), 죽선(竹仙), 화월(花月)이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했음도 확인된다. 이와같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부터 실질적으로 관기제도가 폐지(직제상 페지는 1908년) 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사회로 진출한 관기들이 중심이 된 모임이 바로 1910년 5월에 결성한 ‘대구기생조합’이다. 또한 1905년 경부선 철로가 개통된 이후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상업성을 가지고 자금을 투자하면서 1922년부터 ‘대구권번’으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7년 1월에는 한국인들의 주도로 관기 출신의 염롱산(廉隴山)을 권번장으로 하여 ‘달성권번’이 설립되었다. Ⅲ. 대구지역 근대춤 전승 인맥 대구 근대무용사의 대표적인 인물을 논하라 하면 주로 현대무용의 김상규, 주연희, 김기전, 정순영, 그리고 한국무용의 권명화 외 몇 분을 논하지만, 오늘날의 명맥 및 계승으로 살펴보았을 때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기점은 대구 출신의 정소산과 전남 나주 출신의 박지홍을 들 수 있겠다. 1. 정소산의 전승인맥: 김수희, 하규일→정소산→백년욱, 최묘정정소산은 대정권번 하규일의 문하생으로 1900년대의 근대무용사의 현장에서 신무용의 거센 바람 속에서 궁중무에 대한 소중한 가치와 전통의 맥을 전승·보존하며 대구 근대무용사 맥을 이어온 선구자이며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대구지역의 한국무용이 발전할 수 있도록 기점을 마련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전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소산에 대한 존재감까지도 잊혀진 채 21세기 현재에 이르렀다. 영남지역의 대구를 중심으로 근대무용사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정소산의 무용활동에 대한 예술사적 평가는 대구 근대무용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으며, 무용의 역사를 되짚어봄과 동시에 미래지향적 예술적 가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며, 기록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춤 인생과 무용사적 가치는 대구지역 근대무용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가치 척도가 될 것이며,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 할 것이다. 조선시대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 소속의 관기들은 대구지역의 전통음악을 오늘날까지 이어오도록 한 주역들이다. 조선시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이 제정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여 단체를 구성하였다. 이렇게 대구의 관기 출신의 예기들이 주도적으로 1910년 5월 대구기생조합(大邱妓生組合)이라는 명칭으로 단체를 조직하여 명무(名舞) 김수희 조합장을 중심으로 결성하였다. 다만 김소희에 대한 이력사항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어 생년생몰 연대와 춤 경력에 대해 연구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대구기생조합이 개설되자 김수희 조합장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춤을 배우기 시작한 여섯 살(1910년) 난 어린 소녀가 정소산(본명은 정유색(鄭柳色), 호는 소산(小山), 1904-1978)이었다. 정소산은 1904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아버지 정사운과 상주 정진사댁의 막내딸로 어머니는 약방기생으로 유명했던 박남파 여사 사이의 1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형제들은 모두 비명에 죽었다. 정소산(유색)이도 어릴 적 몸이 약했는데, 기생이 되면 명이 길 운명이란 점장이의 말을 듣고 아버지 몰래 기생을 시키기 위해 춤을 배우게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구기생조합에서 김수희 조합장의 춤을 배운 후 정소산은 부산의 봉래권번<그림 2>, 수원의 화성재인청 등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17세(1921)에는 서울 대정권번에서 지냈다. 권번별 조합별로 조선의 예기들을 소개한 책 『조선미인보감』(1918)에는 원적과 현주소는 경성부 관철동으로 되어 있지만 경성에 머물던 주소인 것 같고, 원래 출생은 대구 중구 동성로 3가 12번지이다. 『조선미인보감』에 수록한 사진은 입적한지 1년 뒤인 18세 때 찍은 것이다.<그림 1> 원문에 보면 편모슬하의 무남독녀로 형편이 좋지 않아 권번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쁜(좋은) 이마와 발을 가졌으며 청랑한 음성으로 시조잡가를 하는 특징이 소개되고 있으며 부드럽고 착한 성품으로 처음 보아도 구면에 본 것 같고 행동과 말투가 구수하다고 정소산의 인물과 성품이 나와 있는데, 이는 대구지방의 사투리 표현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정소산은 ‘다동조합’이 1918년 ‘대정권번’으로 바뀐(매일신보, 1918.1.27) 뒤 1921년 17세에 대정권번에 입적하여 당대의 명인으로 손꼽힌 인물 하규일(1867-1937)으로부터 1923년 19세에 본격적으로 궁중춤을 배웠는데, 김천흥이 전하는 하규일선생님이 가르친 궁중춤은 춘앵전, 무산향, 포구락, 장생보연지무, 무고, 선유락, 항장무, 가인전목단, 검무, 박접무와 재구성한 사고무, 성택무 등이었고, 여창가곡, 가사, 시조도 지도하였다. 하규일과 다수의 기생들이 1923년 대정권번을 탈퇴하여 그해 8월에 ‘경화권번’을 인수하여 설립한 ‘조선권번’으로 출범한 뒤에는 정소산이 직접 학감(1925년)이 되어 기녀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25년 23세 때에는 조선권번에 있던 대가 한성준(1874-1942)으로부터 승무를 배웠다. 그리고 1926년 이후 고향 대구로 돌아온 정소산은 1931년 3월 경북 예천에서 개최된 ‘예천대발전 신축낙성식 축하음악회’ 전단지로 대구조선정악단 일행이 출연한다는 팜플릿에서 확인된다. 달성권번 기생 신금홍을 비롯하여, 정류색(정소산)·황금주·이난향 등과 예천 기생들의 조연으로 소리와 춤을 공연하였던 것이다. 정소산은 가야금을 비롯한 춘앵무, 포구락 등 궁중정재와 살풀이춤, 승무, 장고, 법무 등을 탁월하게 추었다고 한다. 겨우 가정집 방 하나를 세내어 무용교습소라 차려놓고 가르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처음에는 궁중정재 위주로 가르쳤으나 인기도 없고 수입도 수월치 않아 살풀이춤, 승무, 장고 등도 혼합하여 지도하였다고 한다. 42세(1946)에 처음으로 발표회를 열었고, 46세(1948)에는 하서동에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궁중춤 포구락, 무고, 검무 등의 전승과 보급에 힘썼다. 1969년 포구락, 검무, 무고의 궁중춤이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지정 심사에 오르면서 그의 존재가 대구 지역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나 심사에서는 탈락했다. 궁중춤 이외에 잘 알려진 정소산류 춤은 ‘수건춤(흥춤)과 ‘달구벌 검무’로 유명하며, 1978년 사망할 때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한국국악협회 3~5대 경북지부장, 경북 문화상(무용 부문, 1962), 문화공보부장관상,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정소산(鄭小山)(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자로는 그의 며느리였던 최묘정(최복순)과 백년욱, 김기덕, 김해덕, 양영숙, 이윤도, 강명자 등과 타지역 박금술(서울), 이화진(산주), 문소야(익산) 등이 있는데 현재는 백년욱 만이 지역무용계를 지키면서 정소산 춤의 맥을 잇고 있다. 1955년 열 살이 되던 해 정소산의 문하에 들어간 백년욱은 정소산이 타계할 때까지 스승과 함께하면서 정소산의 춤 세계를 체득했으며 2015년 대구시 무형문화제 제18호로 ‘정소산류 수건춤’으로 지정받았다. 정소산의 작품으로는 궁중무용을 중심으로 한 궁중무, 보구락(현재 궁중무용 포구락을 말함.), 무고, 검무, 춘앵무 등이 있으며 민속무로는 소고춤, 장구춤, 바라춤, 농악, 부채춤 외 창작무용으로는 여인의 미, 화랑무, 즉흥무, 조국의 혼, 무영탑, 미선, 꽃보담 내가 예뻐, 낙랑공주, 여인의 예상, 자명고, 단오놀이, 계월향, 낙랑공주, 논개, 직녀성, 원시인의 기상, 흥취 등과 무용극인 구운몽, 논개, 신라의 노처녀 등이 있다. 그의 춤 특징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춤을 추었으며 허리를 굽힌다던지 꼬는 동작들은 없었다는 것은 유장하고 의례적인 궁중정재의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강태홍의 전승인맥: 강태홍→조산월 등 35명1914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수록된 예인 100인은 주로 서울과 평양 중심으로 조사기록한 것이지만 몇 명 안되는 여타지방 출신 중에는 대구출신으로 조산월(趙山月)<13>, 옥화(玉花)<43>, 향심(香心)<61>, 설경패(薛瓊佩)<74> 등 4명에 대한 개인소개가 수록된 것만 보더라도 대구의 조합이나 권번출신들의 서울진출을 확인해주는 기사라고 볼 수 있다. 이어서 1918년 출간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 지송욱(池松旭) 편저)에는 조선 예기 611명의 화보집인데, 대구조합(大邱組合) 소속 32명(28명 대구출신, 4명은 타지방출신), 김천조합 3명이나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앞서 1914년 매일신보에 기록된 조산월(趙山月)은 중복기록 되어 있어 옥화(玉花), 향심(香心), 설경패(薛瓊佩) 3명을 포함하면 35명의 인물들이 대구출신으로 춤과 가야금병창을 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구권번의 춤공연 종목은 고무(鼓舞), 승무, 각항(各項)정재무, 검무, 남무 등이었다고 하였다. 당시 가야금과 가야금병창과 춤을 가르친 명인은 전남 무안 출신의 강태홍(姜太弘,1893-1957)으로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기생)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었다. 이때 1918년 조선미인보감에 수록된 대구조합의 예기 32명중 춤 기예가 기록된 기생은 22명이다. 즉 염옥련(廉玉蓮: 23세, 정재무·남무), 이계화(李桂花: 22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와 김옥산(金玉山, 20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 도란옥(都蘭玉: 21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상남수(尙南秀: 16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안사운(安斯雲: 20세, 검무·승무·각항정재무, 이점홍(李点紅: 18세, 각항정재무), 권복경(權福璟: 21세, 정재무), 도송옥(都松玉: 18세,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승무), 노소옥(盧小玉: 17세, 승무·정재무), 이도희(李桃姬: 16세, 승무·정재무, 윤월향(尹月香: 18세, 검무·고무(鼓舞)), 백금옥(白錦玉: 14세, 검무·승무), 전무선(全舞仙: 18세, 승무), 강매월(姜梅月: 19세, 검무), 최경란(崔瓊蘭: 15세, 선승무(善僧舞)), 그리고 서운향(徐雲香: 14세), 이계란(李桂蘭: 14세), 백초월(白楚月: 14세), 김산옥(金山玉: 16세), 민봉진(閔鳳珍: 16세), 허경희(許瓊姬: 15세)는 승무 한 종목과 국악종목이 기록되어 있다. 종목별로는 승무가 15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서 정재무 11명, 검무 8명, 남무 5명, 고무 1명 등으로 나타났으며, 정재무는 종목이 다양(50여종)하기 때문에 ‘각항정재무(各項呈才舞)’는 많은 정재무를 출 수 있는 능력자를 뜻하며,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은 약간의 정재무를 출 수 있다는 뜻이다. 윤월향의 기록에만 고무를 공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무는 정재종목 중 하나로 윤월향(尹月香)이 여러 정재 중 고무(鼓舞)를 잘 추어서 기예기록에 기록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승무, 병창, 현금(玄琴), 산조, 양금, 가야금 등의 앞에 ‘선(善)’을 붙여 ‘선승무(善僧舞)’ 등으로 표기한 것은 남보다 ‘앞선다’는 뜻으로 우수한 능력자임을 표기한 것이며 ‘특(特)’ 또는 ‘특상(特上)’은 ‘특히 더 잘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또한 산조(酸調)의 한자표기가 오늘날 ‘산조(散調)’ 표기와 다름도 알 수 있다. 그밖에 김매월(金梅月)·박취옥(朴翠玉)·송홍련(宋紅蓮)·안선옥(安鮮玉)·우달경(禹達卿)·우연화(禹蓮花)·이미화(李美花)·조산월(趙山月)·최금란(崔錦蘭)·허금선(許錦仙) 등 10명은 춤 종목 없는 국악종목으로 가야금, 병창, 산조, 가곡, 현금, 양금, 잡가 등과 정자(正字), 초서(草書) 등의 서예도 기록하였다. 이상과 같이 1914년 대구출신 서울에서 활동한 이는 「예단일백인(藝檀一百人)」에 4명과 1918년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의 대구조합의 32 등 35명의 기녀들의 신상명세와 기예능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을 가르친 스승 강태홍(姜太弘,1893~1957)은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으며, 그후 잠시 경주권번으로 갔다가 대구조합이 대구권번(大邱券番)으로 바뀐 후에 다시 돌아와 가르치다가 울산권번(蔚山券番)을 거쳐 1939년(47세) 동래권번(東萊券番)으로 떠났다. 당시 권번조직에서 교육을 담당한 지도자는 전국적으로 남자 재인(才人)과 창우(娼優)들이 춤과 소리와 악기사범을 맡아 지도했었다. 간혹 재능이 뛰어나나 나이가 많아 물러난 퇴기(退妓)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관리자 역할을 하였다. 재인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게 된 배경은 우선 어려서는 무동(舞童)으로 춤과 소리를 배워 추지만 성장하면서부터는 악사역할로 전환하여 악기연주와 수많은 춤과 소리반주를 하면서 장단변화와 춤동작 전개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지도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지도력이 유명해진 재인들은 큰 고을로 모셔가는 것이 많아져 강태홍도 여러 곳의 권번을 거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부산동래에 정착하여 가르친 가야금산조(강태홍류)는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1989, 보유자 신명숙)로 지정되어 전승하고 있으며, 그 때 부산에서 강태홍의 춤을 배운 제자로는 한순서(강태홍류 춤보존회)와 김온경(부산무형문화재 제10호 동래고무 보유자, 1993) 등이 있다. 한순서(1941-)의 증언에 따르면 강태홍은 키가 작으나 흰머리에 변화무쌍하고 재주가 많으며 호쾌하고 멋있게 춤과 연기를 하였다 한다. 그래서 가야금도 다양한 기교로 배웠으며, 춤 역시도 다양하고 활기 넘치고 호쾌하게 춤을 추도록 배웠다. 특히 승무의 북가락은 지금의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한순서로 전승된 승무는 재인계통 승무의 특색인 승복을 벗고 떠나는 결말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살풀이춤은 여인의 한과 감정을 담아서 추는 등 "어떤 춤이 됐던 태마가 있게 추어라”라고 하였으며, "극적인 감정을 살려 추어야지 밋밋하게 추는 것은 멋없는 춤이 된다”라고 지도 하였다고 한다. 그밖에도 춤집이 크고 호쾌한 영남 덧배기가락이 물씬 밴 소고입춤, 장고춤, 바라춤, 화관무, 초립동, 봄타령, 도라지, 꼭두각시 등을 전수받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00년대 초기 대구지역춤을 전승하며 이끌었던 무용인물로는 강태홍을 대표로 꼽을 수 있고 그의 지도를 받은 대구조합과 대구권번의 35명의 기녀들에 대한 자료의 편린(片鱗)이나마 반가운 일이며 아직은 증언자 있어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강태홍은 대구를 일직 떠나 전승력을 잃었는지 대구 전승자가 어딘가에 있는지는 조사연구할 시간이 부족하여 알 수 없다. 혹시나 대구에서 근거자료가 나와 주기를 바랄 뿐이다. 3. 박지홍의 전승인맥: 박지홍→ 최희선(달성권번), 권명화(대동권번)근대의 여명기인 1911년에 대구조합과 뒤를 이은 대구권번의 악가무 지도사범으로 초빙되어 지도하던 강태홍이 떠나고 뒤를 이어 1920년대 후반 지도자로 초빙된 이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 박지홍(朴枝洪, 1884,1889?-1958,1959?)이었다. 박지홍은 서편제의 대가 김창환(1854-1939)의 문하에서 소리를 배우고 사촌형님뻘인 박기홍에게 소리 더늠을 이어받으며 수행고수를 하다가 대구로 이주하였다. 건장한 체격에 미남으로 「심청가」와 「흥보가」를 잘하였다. 박귀희(朴貴姬)가 그에게서 판소리와 단가(短歌)를 배웠고, 박초향(朴初香)이 그에게서 소리를 배웠고, 박동진(朴東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이 「흥보가」를 배웠다. 일제강점기 대구에는 대구기생조합(대구권번), 달성권번과 대동권번 세 곳이 있었다. 1927년 문을 연 달성권번은 대구시 중구 상서동에 소재해 있었고, 해방 후 대동권번은 1940년 전후로 설립되어 대구역 교동시장 근처에 있었다. 이때 달성권번에서 가무를 가르친 사람은 박지홍 외에 채승호(채찬복의 형)가 있었다. 달성권번에서는 춤, 시조, 가곡, 창 등을 공통적으로 익히도록 하였다. 박지홍이 창, 기악, 춤을 지도하였고, 박녹주가 판소리와 춤을 지도했다. 특히 춤에 특출한 기생들은 따로 입춤, 검무, 살풀이춤, 승무 등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대동권번 역시 기본 춤, 시조, 창 등을 공통과목으로 하고 춤으로는 입춤, 살풀이춤, 검무, 승무, 소고춤 등을 가르쳤다. 한편 해방 이후 나주에서 온 살풀이의 대가 박지홍(朴枝洪)에 의해 중구 교동(교동상가백화점 자리)에서 사설 대동권번(이후 남산동에 경북국악원 개설)이 생겨 대구지역에 전통음악교육의 맥을 이어나갔다. 아울러 달성공원 주위와 서문시장 등 사람들이 밀집한 곳에 사설 기생교육단체가 여러 곳 생겨 대구지역 전통음악을 유지하게 되었다.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대구지역 전통음악예술의 원천은 일제강점기 대구기생조합을 비롯한 대구권번과 달성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광복 후 대구의 대동권번에서 ‘기생들의 시험’을 실시하여 뽑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광복 후 두 번째의 기생시험을 1948년 9월에 실시하여 응모자 84명 중 60여 명이 합격되었다고 한다.이와 같이 가무를 하려는 기생이 되려면 이 권번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고, 그들이 3년간 수업을 받으면 요정을 출입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받았다. 수업과목은 춤·시조·풍류·가야금병창 등이었다. 소리·춤·기악 등 악가무를 동시에 지닌 박기홍에서 박지홍으로 이어지는 달성권번, 대동권번의 춤이 대구지역 권번춤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음은 의미로운 사실이다. 이러한 박지홍 권번 교육은 최희선, 권명화에게 계승되어 현재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춤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최희선은 1929년 대구출생(2010.10.12. 작고)으로 10세 후반 명인 박지홍에게 전통춤을 배우며 무용계에 입문하여, 상경하여 1945년 장추화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우고, 한영숙에게 전통춤 사사하고, 1950년 6.25 전쟁 이후 대구에 내려가 박지홍의 춤을 배우고 청구대학에서 공부하며 무용 활동을 하였다. 예그린악단 무용부장이었던 그녀는 1957년 제 1회 최희선 무용발표회를 시작으로 1958년 청구대학 강당에서, 1959년에는 서울국립극장에서 『승무』, 『부채춤』, 『화랑무』, 『장고춤』 등의 한국무용을 선보였다. 권명화는 1934년 경북 김천출생으로 6.25전쟁 중 피난간 대구에서 절집의 풍악소리에 사로잡혀 영남 최고의 풍류객 박지홍을 만나 1950년부터 사사 받고, 그에게서 배운지 6개월 만에 대구극장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 박지홍 고전무용학원 강사가 되었다. 일제의 관할에 있었던 만큼 크게 번성하였던 달성권번은 해방이 되면서 곧바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대동권번은 해방 후에도 얼마간 존속되어 오다가 1950년 화재로 인해 없어졌다고 전한다. 박지홍이 운영하는 대동권번은 그해 남산동 포구당(포교당) 폐기된 절을 기녀와 회원들이 모은 돈으로 임대하여 ‘경북국악원’이라는 이름으로 권번의 역할을 대신하였는데 이때 김천에서 6·25한국동란으로 피난해온 권명화 가족이 피난하여 세든 집이 박지홍의 경북국악원 이웃집이어서 담너머로 연습하는 악가무를 보고 따라 흉내 내다가 용기를 내어 직접 찾아가 입회를 하여 전수를 받았다. 권명화가 전승하고 있는 춤은 승무, 살풀이춤(대구시무형문화재 제9호), 입춤, 소고춤, 검무 등과 경산자인단오제(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의 여원무를 비롯하여 단오굿 일곱거리의 부정굿춤, 산신축원굿춤, 천왕굿춤, 칠성굿춤, 대감굿춤, 장군굿춤, 대신굿춤, 해원굿춤이 있고, 축원춤으로 산거리춤(방울과 부채), 지전춤, 선비춤(한량무), 바라춤, 선녀춤, 오방신장춤, 장군칼춤 등이 있으며 건들바위 치성굿’도 복원하여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91년, 여수)에 출품한 적도 있다. 일제강점기 대구지역의 무대 예능화 된 전통춤은 박지홍을 정점으로 한 달성권번, 대동권번 등 두 개의 권번을 통해 전승되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말 궁중 여령춤을 계승하고 있는 정소산(1898-1975)으로 그 맥이 이어져왔다. 따라서 권번이나 기생을 제외하고는 대구지역 전통춤의 역사적 맥락을 말하기란 어렵다. 박지홍은 대구에서 계속 연구소를 운영하였는데, 1958년 제1회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경북 대표로 참가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제1회 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공연한 작품은 쾌지나칭칭나네, 하회별신굿, 경산옹헤야, 함창모내기놀이, 안동놋다리였다. 당시의 출연진은 신장대에 박지홍, 먹중과 분네에 최희선, 초랭이에 김경자, 양반에 채승호, 선비에 채찬복 등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 당시의 제일 극장에서 앵콜 공연을 준비하다가 장구채를 잡은 채로 과로로 쓰러져 며칠간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매다 마침내 운명하였다. 이 시기의 대구의 전통춤은 기방춤으로 일컬어지는 박지홍류와 궁중무인 정소산류로 크게 대별됨을 알 수 있다.4. 김상규의 전승인맥: 김상규→최영자, 이숙재, 주연희, 서진은 등 대구에서 현대무용이 시작된 시기는 1930년대로 볼 수 있다. 일본의 현대무용 개척자인 이시이바쿠(石井幕)는 우리나라에서도 현대무용의 씨앗을 뿌린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시이 뒤를 이어서 최승희, 조택원, 조용자, 김상규, 김한일, 장추화, 박용호 등 많은 한국의 무용가들이 활약하였다. 대구에서의 현대무용 공연은 1935년 최승희가 대구 공회당에서 한 것이 효시였고, 1936년에 조택원이 같은 장소에서 도불(渡佛)고별공연을 한 것이 그 다음이었다. 중국에서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한 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던 이시이가 귀국도중 대구에 들러 1944년 7월 하순에 대구 공회당에서 공연을 하였다. 같은 해 최승희와 조택원도 대구공회당에서 무용공연을 가졌으며, 8.15광복 직전에 이시이의 문하생 조용자도 대구 공회당에서 발표를 가진 바 있다. 그는 1947년 현재의 대봉동 전신전화국 자리에 대구 최초로 무용연구소를 차려 활동하였다. 해방 된 이듬해인 1946년에는 발레를 전공한 한동인과 정지수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했고, 그 해 가을 장추화, 이석예도 발표회를 가졌다. 1947년에는 이시이 문하생인 박용호와 조용자의 무용공연이 만경관과 키네마에서 있었다. 또한 경북여고를 졸업한 뒤에 신성무용소를 열어 후학을 지도 한 김선화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하였으며, 대구여중 무용교사였던 하복조와 경북여고 무용교사였던 주연희가 찬조출연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지금의 대구 현대무용을 존속케 하는 역사적 효시에는 김상규(金湘圭, 예명 技波, 1922-1989)가 있었다. 김상규는 1922년 5월 25일, 경북 군위군 군위면 금구동 134번지에서 안동 김씨 집안의 부농한 아버지 김병호(金怲鎬)와 어머니 정직영(鄭稷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상규는 누나인 김무숙이 태어나고 5년 만에 낳은 자식이어서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어릴 때부터 춤추는 것을 좋아했으며 한 번은 엿장수가 "엿 사시오?”하며 가위를 "쨍강쨍강” 치자 동생(상규)이 "거기에 맞춰 춤추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누나 김무숙이 말하였다. 또 마을에 남사당패 거리나 서커스단의 공연이 오면 하루도 빠짐없이 구경하며, 이들이 떠날 때면 동네 어귀 멀리까지 따라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성대다가 울면서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김상규의 마음속 우상은 연희패들이었고 자신도 언젠가는 이들과 같은 연희패가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대구로 유학하여 수창초등학교를 다닐 당시 1931년 9월16일 대구극장에서 공연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보면서부터 무용에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법학공부해서 판검사 돼서 오겠다고 핑계를 대고 14세(1935)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와세다중학교를 다니면서 저녁에 이시이바쿠 연구소에 가서 신무용을 배웠으며, 동경전기학교(현 대학승격)를 졸업한 뒤 1941년 와세다대학 문학부와 1943년 동경음악과를 수학해 다방면의 관심을 보여주었고, 1946년 10년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예능분야에 뛰어난 김상규는 영화, 연극, 음악, 회화부문까지 다방면에 재능이 있어 골고루 습득하였다. 농촌의 자연미와 순박성, 넉넉함의 감수성은 무용가로 활동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성들도 사회적 인식을 깨기 힘든 시절에 남성무용수로 향토 대구의 현대무용을 개척하고 뿌리 내리게 한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김상규는 조택원, 최승희, 이시이 등의 공연을 보고 무용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판검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문하에서 다년간 수련을 하고, 대구로 돌아와 신무용 보급을 한 인물이었다. 1945년 8.15광복이후 정치적 혼란기를 거친 다음 대구무용계도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김상규는 1946년 귀국 후 바로 신무용연구소를 개소하였고, 1949년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하고 만경관에서 가진 그의 ‘김상규 신무용 발표회’라는 타이틀의 첫 발표회에는 최희선, 최미연, 박근숙 등 20여 명이 출연하였으며, 이는 대구지역에서 자생한 신무용의 첫 보급이라 할 수 있겠다. 1950년 7월에는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문총구국대가 결성되어 김상규가 무용분과위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 무렵 문하생으로는 김화심, 최영자, 문명희, 이빈화, 박득남, 김경자, 주연희, 박득순, 장성자, 박근숙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얼마 후 문총구국대 경북지대는 해체되고 1951년 12월 19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경북지부가 발족되었으며, 무용위원장은 김상규가 맡았다. 1951년부터 김상규 무용발표회가 국립극장(키네마극장, 현 한일극장, 전쟁 중에 중앙국립극장이 대구로 옮겨짐)에서 자주 열렸고, 이때의 출연자들로는 이월영, 최미연, 이빈화, 최영자, 한순옥, 장일, 문영희, 백운향, 박득남, 박득순 등이 있었고, 김경자, 이숙재, 백년욱 등이 어린나이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김상규는 전쟁이라는 혼란과 모든 공연운영비를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1952년 4월 14일에서 15일(오후 1시, 7시)까지 대구문화극장에서 제2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가졌으며, 휴전될 무렵인 1953년 6월 4일에서 6일(오후 1시,3시 30분,7시)까지는 전쟁 때문에 대구로 무대를 옮겼던 중앙국립극장(현 한일극장)에서 제3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했다. 뚜렷한 연습장 하나 없이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또는 옥상 등을 이용하여 연습하였으며 미제 내의를 검정으로 물들여 연습복으로 입고, 제대로 된 무용화 없이 맨발로 시멘트 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하였다. 그리고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연습과정을 거친 후 공연을 하기 위해서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 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중이 몰려 들었음에도 그 경비를 충당하기 어려워 무용가와 무용가를 둔 집안은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김상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품 발표회를 해마다 열다 보니 논밭을 팔게 되고 결국은 집까지 팔게 되어 셋방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생활형편은 어려워도 대구에서 인정받는 향토계의 춤꾼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대구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남성무용수로 작품세계는 끝없이 폭을 넓혔으며, 자신의 의지대로 춤을 사랑하고 향토계에 예술세계의 밑거름이 되도록 터전을 닦았다. 1956년 이후의 대구무용계는 여전히 김상규의 독무대였다. 김상규는 1951년 제1회 김상규 무용발표회를 가진 이후 1955년 제5회, 1957년 제 6회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김상규 문하생이었던 김상아, 구숙자, 주연희, 장성자, 서차애 등이 키네마에서 열린 제 6회 김상규 무용발표회에 출연하였다. 개인발표회가 없었던 1956년에도 경북예술제에 찬조출연하여 『아뜨리에의 환상』, 『성당의 아침』등 화려한 무용의 향연을 베풀었다. 김상규는 무용인으로는 처음으로 1957년도 경상북도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혈육으로는 대구 가톨릭대 무용학과 교수 김소라가 있으며, 1989년 작고할 때까지 100여편의 작품을 안무하였다. 손꼽히는 제자로는 최영자, 백운향, 박덕남, 박덕순, 백년욱, 이숙재, 김상아, 주연희, 서진은, 장성자, 오애리, 정선자, 김예숙, 이명주, 박성실, 김미연 등이 있다. 김상규의 작품세계는 첫째, 자신의 삶과 주변을 투영시켜 만든 작품으로는 「동심」,「처녀총각」,「애기와 어른」,「형제」,「명상」,「봄노리」,「젊은 날의 추억」,「봄처녀」,「파동」,「새싹」,「무영탑」,「파랑새」,「악몽」,「마음의 생태」,「망상」,「환희」,「월야」,「춘일서정」,「휴식의 환각」,「길손」,「목선」,「소녀시절」,「사의 유혹」,「화염」,「희망의 언덕」,「들국화 피는 시절」,「나그네」,「잃어버린 마음」,「가면무」,「고혼」,「애상곡」,「사슬을 끊고」,「가을의 회상시곡」,「의용」,「가로등」,「건망증」,「완행열차」,「기억을 기다리는 거울」,「은방울」,「초원의 동심」,「지평선」,「개구리의 합창」,「산소결핍」,「고목의 노래」,「수련」,「원색의 회량」,「가면의 생태」,「장미의 꿈」,「푸른 언덕」,「타임」,「작품B」 등이 있고, 둘째, 우리 전통적인 문화와 겨레의 민족성을 다룬 작품으로는 「활양」,「아리랑 삼조」,「황진이」,「향토의 인상」,「태공망」,「살풀이舞」,「건설」,「전설의 환상」,「마음의 생태」,「힘」,「호걸무인」,「검무」,「희생」,「기원」,「유상무상」,「순국의 처녀」,「백홍」,「타령조」,「산소결핍」,「이 흙이 있는 한 절망은 없다」,「수련」,「민족의 흥」,「전진」,「회귀」,「산하」등이 있으며, 셋째, 삶 자체를 불교에 의지해 온 평소의 모습과 심오한 종교관과 사상을 다룬 작품으로는,「창조의 신」,「정불국토」,「무영탑」,「기원」,「유상무상」,「탈속」,「남방의 서정」,「성당의 아침」,「재생」,「아잔타의 꿈」,「관음보살」,「보리수」,「생명의 향연」,「휘데아스의 꿈」,「니르바나」,「원색의 회량」,「간다라의 벽화」,「정각」등 1949년부터 1976년까지 13회에 걸쳐 100여 편을 발표하였다. 그가 30년 이상을 향토 무용계에 독보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주변의 시선에 어려운 점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무용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은 시절부터 여성도 아닌 남성이 무용계에 뛰어들어 지역무용계에 토양을 이루어 낸 공은 인정받아야 할 일임에 분명하다. 5. 정막(정순영)과 김기전의 전승인맥 김상규와 별도로 대구 현대무용의 역사에 빠져서는 안 될 인물로는 정막(鄭漠, 본명 鄭淳永, 1928-2012)과 김기전(金起田, 1935-) 부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50년 무용교육에 뜻을 두고 원화여고에서 정막 무용연구소로 출발했다고 언급한다. 정막은 1947년 겨울, 서울 명동의 문교부 인가 함귀봉이 설립한 조선 교육 무용연구소에 첫 발을 디딘 것이 무용예술의 입문이었고, 6.25사변을 통해 무용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현학선이 1953년 부산극장 종군극작가단 신작무대에 <인어의 정설>로 출연하고, 그해 8·15경축무용제에 중앙국립극장(전쟁으로 대구이전)에서 송범, 김진걸, 이인범과 함께 출연하였다. 그리고 1954년에 중앙국립극장(대구)에서 정막의 안무로 제1회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김기전은 1935년 동경에서 태어나 1940년 여섯살 때 고향인 함경남도로 돌아갔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부산으로 피난 가서 경남여고와 부산대에서 공부하고 경기여대를 수료했다. 어린 시절부터 무용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발표회 무대에 자주 섰다. 피난시절 이인범발레연구소에서 공부하고 1952년 임천수 국보오페라단에 1954년까지 단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7월 육군 군예대(KAS)에서 무용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등을 이용하여 연습을 했고, 미제 내의를 검정색으로 물들여 입고 다시 변형시켜 한번 더 입고, 3번은 활용했다.”며 당시의 열악했던 연습과정을 피력하고 있다. 1958년 12월에는 경북무용협회가 결성되어 키네마에서 창립공연을 하였는데, 정소산, 정막, 최희선, 현학선, 박금슬, 문소조 등이 출연하였다. 이 단체는 경북문화단체 총 연합회로 흡수되었다. 현학선도 이때 처녀무용발표회를 가져 향토무용계를 고무시켰다. 1961년 대구바레아카데미를 창설하고 부인 김기전과 대구지역에서 현대춤과 발레를 교습하여 춤인재를 양성하였다. 김기전은 국내 최초로 대구시립현대무용단을 설립하여 초대(1981~1988년) 안무자로 대구 현대무용계를 직업무용단으로 이끌어왔다. 정막은 춤 실연자이자 춤 연출자, 안무가로서, 그리고 춤 교육자, 이론가, 평론가로서 대구, 경북지역 춤문화의 구심체였다. 2000년에 이르러 (사)대구시민문화연구소를 차려 대구지역 춤문화를 비롯하여 시민문화 향상에 매진해온 일은 중앙중심의 무용편중에 대한 대항마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무용공연에 관계되는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으나 그 경비를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따라서 재정적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춤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무용가들이 세인의 눈총을 받으며 춤을 춘 배고픔 속에서도 민족혼을 고취시키고 춤 예술의 지평을 여는 창작 무용들을 계속 발표하였기 때문에 예술가로서 인정받는 좋은 환경의 무용세계를 후배 무용가들에게 물려주게 된 계기가 마련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Ⅳ. 결언- 근대전기 대구지역춤의 인맥적 특징과 의의 근대의 여명기라 할 수 있는 1960년 이전 대구지역춤의 전승인맥을 고찰하면서 살펴본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정소산, 강태홍, 박지홍, 김상규 등 춤 명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구지역춤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여‘춤의 고장을 수립’하였다. 대구인들의 뛰어난 적응력과 강인한 개척정신은 근대 혼돈의 역사 속에서도 대구의 전통적 춤기반을 이어받아 전승하였고 새로운 현대춤도 정착시켜나갔다. 2) 각자 독자적인 춤정신과 다양한 춤방식으로 대구춤을 범한국적이고 세계적인‘안무도시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대구지역 전통춤의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역춤의 유입전승, 궁중춤을 민속춤으로 이동한 계층전승, 외래전승, 창조전승 등의 각자 다양한 전승원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대구지역 전통춤(교방 및 기방춤, 민간춤, 종교의식춤)을 꾸준히 계승한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방무용인(박지홍, 강태홍)들을 초청하여 대구 전통춤으로 정착시킨 유입전승, 수준높은 궁중춤을 대구민속춤으로 정착(정소산)시킨 계층전승, 국제무대로 진출하여 현대춤을 세계적인 현대춤 도시(김상규)로 도약시킨 외래전승, 근현대 무용가들의 창작정신으로 대구현대춤(김상규, 정막, 김기전)을 발전시킨 창조정신 등으로 대구춤계를 주도하였으며 후대에 대구출신 무용가들이 경향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3) 대구감영과 대구부 예기(藝妓)들의 뿌리깊은 교방춤과 전통춤 등‘역사춤의 혈통 계승’으로 근대춤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이바지하였다.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1736)(1768),『경상도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보이는 대구예기들의 교방춤과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까지 이어진 예기들의 후예의 피가 흐르고 있다. 4) 6·25동란으로 북한지방과 수도권 피난민이 대구로 집결하였고 임시 중앙국립극장 설립으로 ‘춤공연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당대 최고급 명무공연과 춤인적 교류가 활발하였다. 5) 대구지역춤에는 영남춤의 보편적 특징, 영남북부춤의 중심적 특징, 대구의 향토춤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영남춤의 요람(메카)’으로 발돋음하였다. 민간전승의 민속춤은 오랜 역사속에 뿌리내리며 정착된 전통문화이기에 생태적으로 영남권춤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며, 더불어 영남북부권의 거점도시로 영남남부와 다른 영남북부권춤의 특성도 지니고, 대구만의 향토춤도 여전히 전승되어 왔다.결국 대구는 근원적으로 한국전통춤 중에서 광역적인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면서 대구만의 지역민속춤의 특색을 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일제강점과 서구문화의 홍수와 6·25 한국동란으로 인한 대구집중화 현상 등 급변하는 역사와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대구지역춤은 지역화, 탈지역화, 범한국화, 중심화, 국제화 등으로 중앙무대와의 교류가 활달하게 전개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20세기 근대전기의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나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도 있다. 물론 한국근대사의 범국가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1960년 이전의 한국사회는 근대춤의 ‘여명기’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혼란기’이며 ‘전란기’이기에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전통문화의 ‘쇠퇴기’이며 외래문화의 ‘범람기’의 시련을 겪었다. 따라서 대구춤 역시 비켜갈 수 없는 운명으로 현란했던 관아의 교방춤과 권번춤은 역사의 뒤안길(박지홍, 정소산)로 접어들어 몇몇 춤꾼(최희선, 권명화, 백년욱 등)과 몇 가지 춤만이 명맥을 잇고 있는 실정이었다. 시대조류에 따라 한국춤은 전통춤과 창작춤을 동시에 표현하는 어려움에서도 꿋꿋이 맥(백년욱, 주연희 등)을 이어 왔다. 현대춤과 발레는 대구(김상규, 최원경, 김기전, 구본숙)는 물론 서울 등지로 진출(이숙재, 김복희, 박인숙, 백현순, 이화석, 김용철, 손윤숙)하여‘춤의 고장’의 토양에서 성장하여 대구출신다운 유명 무용가들도 많은 점 또한 이를 반증하는 것들이다. 이제 많은 중견무용가들(박연진, 임혜자, 이정일, 김현옥, 장유경, 김희숙, 박현옥, 김소라, 강정선, 김죽엽, 최두혁, 오레지나, 채명)과 수많은 신진무용가들(김순주, 김나영, 김명란, 김현태, 김희경, 노진환, 박미향, 박정희, 박종수, 변인숙, 안지혜, 우혜영, 유연아, 이경화, 이수연, 이승대, 장 오, 장현희, 장혜린, 전효진, 조은희, 최석민, 최윤영, 추현주, 편봉하)등이 대를 이어 대구춤의 정신과 전성기를 향해 매진하고 있어 밝은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고 본다.(대구세계안무페스티벌 세미나에서 발제된 원고) ) 참고문헌 계명대 한국학연구소(2011). 영남의 지역예술연구.金宅圭·朴大鉉 編譯(1997). 大丘邑誌, 대구광역시.김영희(2006). 개화기대중예술의 꽃, 기생, 민속원.김죽엽(2010). 정소산의 작품활동을 통한 무용사적 고찰: 대구활동을 중심으로, 영남 악가무 재조명, 서울:한국국악학회.김죽엽(2011),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정재가 대구무용사에 끼친 영향, 음악문헌학, Vol.- No.2, 한국음악문헌학회.김죽엽(2013).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존재적 가치인식론, 한국무용학회 13권 2호.김채현·김영희·이종숙·김채원·조경아(2015,). 한국춤통사, 보고사.김천흥(2005). 우리춤이야기, 민속원.노동은(1995). 한국근대음악사1, 한길사.대구시사편찬위원회(1995). 대구시사. 대구시.대구예총(2012). 대구예총50년사. 대구: 동연합회.박민우(2013), 김상규 생애를 통한 무용사적 고찰,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석사학위 논문.박성실(1997), 韓國近代舞踊史에 나타난 金湘圭의 춤 硏究 : 敎育者的 成長科程을 中心으로, 中央大學校 大學院.박연진·장유경(1993). 대구 한국무용 30년사, 한국무용연구 11집, 한국무용연구회.박연진·장유경(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박황(1974). 판소리소사. 신구문화사.배연형(2011). 한국유성기음반 : 1907-1945, 권5. 한걸음 더.손태룡(2001). 每日申報音樂記事總索引:1910.5.30.-1945.8.15. 民俗苑.손태룡(2005). 달성권번의 음악사학적 조명, 향토문화 제20 특집호, 대구향토문화연구소.손태룡(2012). 대구지역의 기생단체 연구, 한국학논집 46,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송기영(2011). 정소산의 예술 활동이 대구 근대 무용사에 끼친 영향, 모드니 예술 5집, 한국문화예술교육학회.송방송(2003). 京城放送局에 출연한 藝妓의 공연활동, 한국근대음악사연구, 민속원.송방송(2007). 증보한국음악통사, 서울: 민속원.宋芳松(2012). 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송방송·이진원(2007).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 민속원.안제승(1984). 한국신무용사, 승리문화사.윤미라(2000). 대구 달구벌 입춤의 전승과 변형에 관한 연구, 대한무용학회 제28호.윤현숙(2007). 대구지역 무용의 흐름에 관한 연구,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이규리(2004). 朝鮮後期 外方官妓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이병옥(2011). 영남춤의 생태민속학적 고찰, 한국무용연구, 29권 2호, 한국무용연구학회,이병옥(2013). 한국 전통춤의 분류와 양식적 특징: 정병호의 분류법 검토를 중심으로, 공연문화연구 27권.이숙영(1995). 지역문화 예술로서 현대무용의 활성화 방안 : 광주,대구,부산 지역 공연관람자를 중심으로.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이숙재(1999). 技波 金湘圭 삶과 예술, 그리고 작품세계의 재조명, 한국 근대춤 인물사(1), 송수남 엮음, 현대미학사.이은주(2007). 춤 33인, 푸른미디어.정순영(2013). 대구춤 60년사, 사단법인 다다.주연희·구본숙(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채명·박정희(2010). 춤신을 만나다 권명화, 대구동구팔공문화원.채희완(2013). 춤창작과 비평에 예술공학 시스템을 도입함, 대구춤 60년사, 정순영 저, 사단법인 다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8). 한국유성기음반총목록. 민속원.錄音文獻學會(昭和11). レコド文化發達史.<광무대(光武臺)>(한겨레음악대사전, 2012.11.2. 도서출판 보고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48646&cid=42607&categoryId=42607.<한국근대의 음악원형>(http://music.culturecontent.com) 참조.<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대정권번(大正券番)>(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지방의 권번>(기생 이야기-일제시대의 대중스타, 2007. 7. 5, ㈜살림출판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87073&cid=42967&categoryId=42967.<조선 기생>, 연예인이 되다 – 역사채널e 2016.06.14. http://blog.naver.com/eunayoon715/220725445504.『매일신문』. 1958.8.10.『동아일보』. 1958.8.13.『매일신문』. 1958.8.9., 9.1.『매일신보』. 1972.11. 16.『매일신보』. 1914.1.28.-6.11.『대구시보』. 1948.9.23.월간 대구문화. 2007.4월호.이생강 면담, 2013, 면담자: 김죽엽.한순서 전화면담, 2016.7.13. 면담자 : 이병옥.한순서 면담, 2010~2013, 장소: 강태홍춤연구소, 면담자: 이병옥.권명화 전화면담, 2016.7.16.~18(3회), 면담자: 이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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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간의 무형유산 종합축제 ‘2023 무형유산축전’ 1일 개막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원장 안형순)은 개원 10주년과 무형문화유산 보호 협약 20주년을 기념하여 열리는 ‘2023 무형유산축전’의 개막식을 9월 1일 오후 4시에 국립무형유산원 중정(전라북도 전주시)에서 개최한다.‘2023 무형유산축전’은 지난 5월 국가유산 체제로의 전환에 발맞춰 ‘전승’과 ‘창조’라는 주제 아래 무형유산의 새로운 의미를 밝히기 위해 마련되는 무형유산 종합축제이다.개막식에는 국립무형유산원 기념·축하영상 상영과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보유자 김일구・김영자 등의 축하공연, 방짜 유기 타종 개막 기념 퍼포먼스가 풍성하게 준비됐다. 또한, 최응천 문화재청장이 무형유산 전승에 공헌한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단체) 240여 명에게 대통령 명의 증서를 전달하고, 국립무형유산원 개원 10주년을 기념하여 유공자 표창을 수여할 예정으로 더욱 의미를 더한다. 대통령증서는 240여 명의 보유자(단체)를 대표하여 이영희(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 정춘모(갓일 보유자), 빈순애(강릉단오제 보존회장/보유자)씨가, 개원 10주년 업무추진 유공 청장 표창은 백덕규(김제시청 학예연구사), 김석곤(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 임영호(연희컴퍼니 유희 연출가), 남성무용단(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 등 15명이 받을 예정이다.개막식 후 오후 5시부터 9시까지는 연계 행사로 국가무형유산 기능보유자 합동공개행사, 국가무형유산 보유자 작품전, 미디어 아트(기록의 정원), 전통연희 판놀음(개막공연) 등이 마련되어 있어, 청명한 가을을 앞둔 9월의 첫날 아름다운 전통의 멋이 함께하는 뜻깊은 시간이 될 것이다.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은 앞으로도 무형유산의 가치를 확산할 수 있는 다양한 전시와 공연을 지속적으로 개발·운영하는 적극행정을 실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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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유산축전' 개막,미디어 아트·전시로 무형유산 만난다공연과 전시, 체험으로 무형유산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다.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은 개원 10주년과 무형문화유산 보호 협약 2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2023 무형유산축전’의 개막식을 9월 1일 전라북도 전주시 국립무형유산원 중정에서 개최한다. ‘무형유산축전’은 지난 5월 국가유산 체제로의 전환에 발맞춰 ‘전승’과 ‘창조’라는 주제 아래 무형유산의 새로운 의미를 밝히기 위해 마련되는 무형유산 종합축제다. 개막식에서는 국립무형유산원 기념·축하영상 상영과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보유자 김일구·김영자 등의 축하공연, 방짜 유기 타종 개막 기념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최응천 문화재청장이 무형유산 전승에 공헌한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단체) 240여 명에게 대통령 명의 증서를 전달한다. 대통령 증서는 보유자를 대표해 이영희(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 정춘모(갓일 보유자), 빈순애(강릉단오제 보존회장/보유자)씨가 받는다. 개원 10주년 업무추진 유공 청장 표창은 백덕규(김제시청 학예연구사), 김석곤(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 임영호(연희컴퍼니 유희 연출가), 남성무용단(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 등 15명이 받을 예정이다. 개막식 후 연계 행사로 ‘국가무형유산 기능보유자 합동공개행사’ ‘국가무형유산 보유자 작품전’ ‘미디어 아트(기록의 정원)’ ‘전통연희 판놀음(개막공연)’ 등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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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간의 무형유산 종합축제 ‘2023 무형유산축전’ 1일 개막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원장 안형순)은 개원 10주년과 무형문화유산 보호 협약 20주년을 기념하여 열리는 ‘2023 무형유산축전’의 개막식을 9월 1일 오후 4시에 국립무형유산원 중정(전라북도 전주시)에서 개최한다. ‘2023 무형유산축전’은 지난 5월 국가유산 체제로의 전환에 발맞춰 ‘전승’과 ‘창조’라는 주제 아래 무형유산의 새로운 의미를 밝히기 위해 마련되는 무형유산 종합축제이다. 개막식에는 국립무형유산원 기념·축하영상 상영과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보유자 김일구・김영자 등의 축하공연, 방짜 유기 타종 개막 기념 퍼포먼스가 풍성하게 준비됐다. 최응천 문화재청장이 무형유산 전승에 공헌한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단체) 240여 명에게 대통령 명의 증서를 전달하고, 국립무형유산원 개원 10주년을 기념하여 유공자 표창을 수여할 예정으로 더욱 의미를 더한다. 대통령증서는 240여 명의 보유자(단체)를 대표하여 이영희(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 정춘모(갓일 보유자), 빈순애(강릉단오제 보존회장/보유자)씨가, 개원 10주년 업무추진 유공 청장 표창은 백덕규(김제시청 학예연구사), 김석곤(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 임영호(연희컴퍼니 유희 연출가), 남성무용단(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 등 15명이 받을 예정이다. 개막식 후 오후 5시부터 9시까지는 연계 행사로「국가무형유산 기능보유자 합동공개행사」, 「국가무형유산 보유자 작품전」, 「미디어 아트(기록의 정원)」, 「전통연희 판놀음(개막공연)」등이 마련되어 있어, 청명한 가을을 앞둔 9월의 첫날 아름다운 전통의 멋이 함께하는 뜻깊은 시간이 될 것이다.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은 앞으로도 무형유산의 가치를 확산할 수 있는 다양한 전시와 공연을 지속적으로 개발·운영하는 적극행정을 실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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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담농악단, '풍악이담'에서 농악,탈춤,양금 콜라보 펼쳐22일 오후 7시 동두천 시민회관에서 동두천이담농악단이 주관한 '풍악이담'이 무대에 올랐다. 경기문화재단 '2023모든예술31' 선정작 '풍악이담'은 동두천시 무형문화재 제3호 이담농악 이수자들과 전문 공연자들이 함께 제작한 공연이다. 인류무형문화유산 '농악'과 '탈춤'이 새로이 창작된 '설장구 시나위'와 '양금 시나위'와 함께 펼쳐졌다. ▶사물놀이&양금합주: '양금 시나위', ▶탈춤: '관노가면극 '술·술탈탈 무탈하다', ▶'사물놀이&관현악 합주: '설장구 시나위',를 선사했다. 농악, 관현악과 가면극을 조합하여 신선한 무대를 엮어내어 전통 민속연희와 북한 개량악기 양금 연주를 즐길 수 있는 무대를 보여주었다. 박은수 양금 연주&김경수 가락='양금 시나위' 이담농악보존회의 박은수 양금 연주자가 연주한 '양금 시나위'(작곡:윤은화)는 경기북부 웃다리 농악 가락에 양금 편성을 더하여 새롭게 작곡해낸 곡이다. 양금 연주자 윤은화 선생이 이담농악의 대표가락인 쩍쩍이-칠채-육채-마 당삼채-짝쇠 가락을 전수받고 이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탄생시켜 작곡한 곡이다. 2022년 동두천시립이담농악단 정기공연을 통해 초연한 바 있다. 이담농악보존회의 박은수 연주자가 직접 양금을 사사받고 양금 연주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담농악의 대표적인 가락인 칠채를 바탕으로, 동두천시 무형문화재 제3호 이담농악 보유자인 김경수 보유자의 특색 있는 열채 소리와 양금만의 고유 한 음색을 결합한 '칠채', 각 악기들의 주고받기 구성에 양금을 포함한 '육채', 상쇠와 부쇠가 이끌어나가는 가락을 양금으로 대체한 '짝쇠' 장단으로 이루어져있다. 관노가면극(국가무형문화재 제13호) 관노가면극은 강릉단오제에서 연희되는 가면극이다. 조선시대 관청의 노비들의 놀이로 국내 유일의 무언 가면극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양반광대1명, 소매각시1명, 시시딱딱이 2명, 장자마리 2명 그리고 여러 명의 악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강릉관노가면극은 제1과장 장자마리춤, 제2과장 양반광대·소매각시춤, 제3과장 시시딱딱이춤, 제4과장 소매각시의 자살과 소생으로 구성되어 있다. 양반광대는 신분은 양반이지만 약간 모자라고, 권력을 휘두르나 미색에 빠져 권위와 체면을 손상시키는 인물이다. 권위의 상징인 양반을 부정적인 인물로 설정하여 그들의 허세와 위선을 풍자하고 해학적인 즐거움을 주고 있다. 설장구 시나위(구성:김경수, 작곡:이고운) 4인의 설장구 연주자와 대금, 피리, 가야금, 아쟁, 신디 5인의 기악 연주자가 함께 하는 관현타악 협주곡이다. 설장구 시나위는 4인의 설장구 연주자가 설장구 한 판을 연주하는 동안 5인의 기악 연주자들이 설장구에 맞춰 즉흥에 가깝게 주고받거나, 함께 연주하는 구조로 이루어진다. 이 경우 기악 연주자들은 설장구의 가락과 장단과 유사한 새로운 장단을 만들어 연주하게 된다. 이런 장단들의 구성은 시나위 연주자들과 설장구 연주자들의 협의를 통해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장단들로, 이전까지 없었던 가락과 기존 설장구 가락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설장구 시나위는 앞서 ‘2021 대한민국 예술축전’에서 국악부문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연주에는 이담농악 예능보유자 김경수, 이담농악 이수자 고양옥, 박은수, 김해민, 최영호, 황진하, 이담농악 전수자 김다운, 주한솔이 함께 했다. 총연출을 맡은 김경수 단장은 "인류무형문화유산 '농악'과 '탈춤'을 널리 알리고,' K-국악'의 새로운 버젼을 선사해 보았다. 최근에 새로이 창작된 '설장구 시나위'와 '양금 시나위'의 반응이 좋아서 내년에도 실험적 무대를 준비하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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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여름 밤 무료 야외공연 ‘우면산별밤축제’국립국악원이 늦여름 밤 열기를 시원하게 날려버릴 야외 공연 ‘우면산별밤축제’를 선보인다. 국립국악원(원장 김영운)은 오는 19일(토)부터 9월 16일(토)까지 매주 토요일 저녁 8시 국립국악원 연희마당 무대에서 기획공연 ‘우면산별밤축제’를 5회에 걸쳐 선보인다. ‘우면산별밤축제’는 남녀노소 누구나 무료로 즐길 수 있는 공연으로 탄탄한 음악성과 대중성으로 무장한 국악 단체들이 출연해 바쁜 일상에 지친 관객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예정이다. 올해는 풍물 중심의 전통연희를 비롯해 창작국악, 굿음악 등 관객과 함께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무대로 꾸며진다.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연희부 창단 40주년 기념 악‧가‧무 종합 무대 (8.19.) 판소리·경기민요·정가 대표 소리꾼이 한자리에! ‘이봉근X채수현X하윤주’ (8.26.) ‘우면산별밤축제’의 첫 무대는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연희부의 창단 40주년을 기념해 악(樂)·가(歌)·무(舞)를 포함한 종합예술공연으로 문을 연다. 이번 공연에서는 연희꾼이 악기 연주와 기예를 펼치는 것 뿐 아니라, 소리꾼과 함께 소리를 주고받는 등 그동안 보지 못했던 연희 공연의 새로운 모습을 선보일 예정이다. 두 번째 무대는 국악 성악 장르를 대표하는 이봉근(판소리), 채수현(경기소리), 하윤주(정가)가 함께 무대에 올라 우리 소리의 다양한 색을 악기 선율과 함께 전한다. 경기소리로 시작하여 정가, 판소리 그리고 아리랑 합창을 마지막으로 하는 이색적인 무대로 꾸민다. 서울굿과 단오굿의 만남! ‘서울굿보존회X전통연희창작집단 푸너리’ (9.2.) 우리나라 각 지역의 탈놀이를 한번에! ‘(사)한국전통연희단체총연합회’ (9.9.) 세 번째 무대는 ‘서울굿보존회’와 ‘전통연희창작집단 푸너리’가 이번 공연을 위해 서울굿과 단오굿을 중심으로 새롭게 꾸민 완성도 높은 굿 한마당을 선보인다. 흥겨운 무가(巫歌)와 화려한 무무(巫舞)로 공연을 찾은 관객의 소원 성취와 안녕을 기원한다. 네 번째 무대는 50여 명의 대규모 연희꾼으로 구성된 ‘(사)전통연희단체총연합회’가 삼도(서울·경기·영남·호남)의 탈놀이 중 대표적인 작품들을 선별해 구성한 공연을 선보인다. ‘비나리’를 시작으로 ‘삼도탈춤’, ‘오방사자놀음’ 등 마당에서 함께 즐길 수 있는 작품을 통해 관객들의 삶에 활력을 불어 넣고 치유와 위로를 선사한다. 가을밤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는 국악관현악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9.16.) ‘우면산별밤축제’의 마지막 무대인 9월 16일(토)에는 ‘국립국악원 창작악단’이 출연해 국악관현악 편성의 다양한 작품을 연주한다. 이번 공연은 가곡과 협주곡 등 관객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무대로 꾸며 지휘에는 권성택(창작악단 예술감독), 협연에는 김보미(국립국악원 창작악단), 박진희·이동영(국립국악원 정악단), 채수현·김세윤(국립국악원 민속악단)이 함께 한다. 국립국악원의 기획공연 ‘우면산별밤축제’는 오는 8월 19일(토)부터 9월 16일(토)까지 매주 토요일 저녁 8시, 국립국악원 연희마당 무대에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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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무형유산원, ‘이수자뎐(傳)’, 차세대 무형유산 전승주역들의 공연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은 오는 22일부터 8월 19일까지 총 4차례에 걸쳐 토요일 오후 4시 국립무형유산원(전주) 얼쑤마루 소공연장에서 ‘2023 이수자뎐(傳)’을 개최한다. 이수자(履修者)는 보유자 또는 보유단체, 전수교육대학으로부터 전수교육을 수료하고 국가에서시행하는 기량심사를 거쳐 이수증을 발급받은 무형문화재 전승자를 말한다. '이수자뎐(傳)'은 무형유산의 차세대 전승주역인 이수자들이 활약할 수 있는 장을 넓히고자 추진되는 공모 공연으로, 공모·심사로 선정된 무형유산 이수자들의 작품으로 진행된다. 올해에는 악사주도형 굿으로서 ‘양중’의 역할과 강릉단오제 ‘무악’의 미적본질에 대해 조명하는 ▲ '양중 지(之) 미음(微吟)'(강릉단오제/7.22.)을시작으로, 가야금병창의 연주 곡목(레퍼토리)을 23현가야금병창, 철가야금병창, 25현가야금병창 등으로 재창작한 ▲ '모던 수궁가_과거와 현재의 만남'(가야금산조 및 병창/8.5.), 스승들의 계보를 이어온 승무에 대한 고민을 담아낸 ▲'생명의 몸짓, 그 치유의 무무무무 : 巫武舞無'(승무/8.12.), 12대에 걸쳐 세습무로 이어져온 남해안별신굿을 세 남매의 이야기로 구성한▲ '연(聯), 별신 이야기'(남해안별신굿/8.19.)까지 역량 있는 이수자들의 작품 총 4편이 펼쳐진다. 무형유산의 전통적인 멋과 아름다움을 각자의 개성으로 승화한 가(歌)·무(舞)·악(樂)·희(戱)의 다채로운 공연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공연일 선정자 공연주제(선정종목) 주요 내용 7.22. 성휘경 양중 之 미음(微吟) : 양중이 노래를 읊조리다 (국가무형문화재 강릉단오제) 악사주도형 굿으로서 ‘양중’의 역할과 강릉단오굿 무악의 미적본질 조명 8.5. 이은희 모던 수궁가_과거와 현재의 만남 (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 및 병창) 가야금병창의 레퍼토리를 23현가야금병창, 철가야금병창, 25현가야금병창 등으로 재창작 8.12. 권효진 생명의 몸짓, 그 치유의 무무무무 : 巫武舞無 (국가무형문화재 승무) 스승들의 계보를 잇는 승무를 현재적 고민과 실천으로 재구성한 무대 8.19. 정은주, 정석진, 정승훈 연(聯), 별신 이야기-삼남매의 별신이야기 (국가무형문화재 남해안별신굿) 12대 세습무로 이어진 남해안별신굿을 세 남매의 이야기로 구성 공연은 전석 무료이며, 각 공연별 10일 전부터 국립무형유산원 누리집(www.nihc.go.kr)에서 사전 예약을 통해 관람이 가능하다. 현장 관람이 어려운 국민은 국립무형유산원 유튜브(www.youtube.com/@nihc2014)로 실시간 관람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국립무형유산원 누리집(www.nihc.go.kr)을 참고하거나 전화 (☎063-280-1500, 1501)로 문의하면 된다.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은 "앞으로도 무형유산 이수자들이 더욱 폭넓은 관람객과 만나 그 아름다움과 가치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다양한 기회를 마련해나갈 예정"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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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국악원, 30일 굿 음악 축제국립남도국악원은 오는 30일부터 다음 달 2일까지 '2023 굿 음악 축제'를 연다. 올해로 20회째를 맞는 축제에서는 '단오굿'을 주제로 공연, 학술회의, 체험, 문화 탐방 등이 진행된다. 이번 공연에서는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무속 수륙제'가 펼쳐진다. 7월 1일 오후 5시에는 '강릉단오굿' 공연을 무대에 올린다. 1967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강릉단오제는 대관령 서낭을 제사하며 산로안전(山路安全)과 풍작·풍어, 집안의 태평 등을 기원하는 제의이자 축제다. 같은 날 오전에는 우리나라의 대표 단오굿인 강릉 단오굿과 법성포 단오굿 등을 중심으로 역사와 전승 현황, 음악의 특징에 대한 학술 연구성과가 발표된다. 30일 오후 7시 남도국악원 야외무대 달빛 마당에서 법성포 단오제보존회 초청 '법성포 단오굿: 무속 수륙제' 공연이 열린다. 영광 법성포 지역에서 단오 기간 행해지는 난장 트기, 용왕제, 선유 놀이, 국악 경연 대회 등으로 구성됐다. 남도국악원 관계자는 18일 "참가자들은 공연 행사와 함께 '소형 국악기 만들기 체험'과 '해설이 있는 진도 문화 탐방' 등의 부대행사도 누릴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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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한국의 지역춤, 대구·경북지역의 춤지리와 기후환경에 따른 대구·경북인의 기질 대구·경북지역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남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두대간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기후(盆地氣候)를 이루고 있어 분지 내부의 복사열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해 심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자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라는 신조어를 쓸 정도로 무더운 날이 많다. 그리하여 대구·경북인들은 뛰어난 적응력과 강인한 개척정신, 의리와 결단력을 중시하며 이러한 생태환경적 배경으로 대구·경북지역만의 독특한 춤문화를 형성하여 발전시켜왔다. 신라 천년의 문화적 배경과 춤전승 대구·경북지역은 역사적으로 서라벌(경주)을 도읍지로 시작해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약 1천 년 동안 행정, 산업,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전통적으로 보수성과 선비정신이 높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행정의 중심이 송도(개성)와 한양(서울)로 옮겨진 고려와 조선시대까지도 영남호족의 세력이 여전히 핵심을 유지하면서 오늘날까지 ‘선비(양반)정신’이 깃들어 있는 독특한 지역춤의 특성을 전승하여왔다. 신라시대 악성(樂聖) 우륵이 가야금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는 가야지무(伽倻之舞), 한기무(韓岐舞), 미지무(美知舞), 대금무(?琴舞)가 있었고, 계고(階古)에게는 가야금을, 법지(法知)에게는 노래를, 만덕(萬德)에게는 춤을 각각 가르쳤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전한다. 뿐만 아니라 황창무(黃昌舞)와 처용무(處容舞), 상염무(霜髥舞), 무애무(無?舞), 오기(五伎) 등 남성춤도 많았다. 그밖에도 도솔가무(兜率歌舞), 회소곡(會蘇曲), 그리고 팔관회와 연등회에서 가무백희(歌舞百戱) 등 민간생활과 밀접한 춤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경상감영의 관기와 권번춤 전승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대구지역에 감영 설치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경주와 상주로 이어져 온 경상감영이 1601년(선조34년)에 대구로 이전하게 되면서 경상도의 중심적 거점도시로 변모되면서 국가와 지역적 행사가 많아졌다. 경상감영(지금의 중구 포정동 경상감영공원 일대)과 대구부(大邱府)에 소속된 관기(官妓)들의 악가무 활동이 활성화 되었던 것이다.<『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1736년,영조 43년),『대구읍지大丘邑誌』(1768년 발간), 『경상도 읍지』(1832년경), 『영남읍지』(1871년경,1895년),『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1888) 등> 그러나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부터 실질적으로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이 사회로 진출하게 되는데,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모임이 1910년 5월에 결성한 ‘대구기생조합’이다. 1914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수록된 예인 100인 중에는 대구출신으로 조산월(趙山月), 옥화(玉花), 향심(香心), 설경패(薛瓊佩) 등 4명이 대구기생조합이나 서울로 진출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1918년 출간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 지송욱(池松旭) 편저)에는 조선 예기 611명 중 대구조합(大邱組合) 소속 32명, 김천조합 소속이 3명이나 기록되어 있고, 고무(鼓舞), 승무, 각항(各項)정재무, 검무, 남무 등을 잘 추었다고 하였다. 1922년부터 ‘대구권번’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1927년 ‘달성권번’이 새로 설립되었다. 무형문화재 종목의 연희와 춤들 대구·경북지역이 고대부터 근대까지 영남지역의 중심지였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제침탈의 거점인 부산·경남지역이 중심도시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유교와 양반문화를 비롯한 예술문화는 여전히 대구·경북지역에 뿌리 깊게 남아있었다.농악영남지역 농악이 다른 지역 농악과 가장 큰 차이는 시각적으로 엄청나게 큰 고깔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영남북부권이 남부권보다 더 큰 고깔을 쓰는 경향을 보이며, 판굿도 발달하여 7종목(고산, 욱수, 청도차산, 금릉, 비산(날뫼), 구미무을, 경산보인)이나 지정되어 있다. 그 특징은 원박적이고 아주 빠른 리듬과 웅장한 북춤과 화려한 고깔춤이 발달했으며, 천왕매기굿(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굿)이나 지신밟기에서 잡귀잡신을 쫓는 힘찬 덧배기가락과 덧배기춤이 발달했으며, 개인놀이보다 집단놀이와 뒤풀이춤이 발달했다. 고산농악(대구 1호)은 농기구를 앞세우고 태극무늬로 도는 덩덕궁이, 원을 돌며 각자 춤추는 춤굿, 손잡고 원을 돌면서 닭을 쫓는 닭쫓기, 나선형(螺旋形)으로 들어갔다 풀어 나오는 방석말이 등이 특징이다. 욱수농악(대구 3호)은 동제당 앞에서 신내림을 받는 천왕받이굿과 원형으로 춤을 추는 둥글데미, 세로 2줄로 마주보고 앉은 연주자들을 상쇠가 Z형으로 빠르게 돌면서 징·북·장구·법고 열로 끊어 일으켜 풀어나가는 외따기와 흥겨운 어깨춤을 추는 덧배기춤 등이 특징이다. 청도차산농악(경북 4호)은 천왕기(天王旗)싸움에서 발달한 농악으로 꿋꿋하고 향토적인 옛스러움과 질박함을 간직하고 있으며, 장단을 외가락으로 빨리 몰아가는 경우가 많아 소박하고 씩씩한 느낌을 준다. 금릉빗내농악(경북 8호)은 마을의 성황제와 풍년을 기원하는 별신제(別神祭)가 섞여진 동제(洞祭)의 형태로 진풀이 농악과 무당굿과 줄다리기 등이 혼합되어 가락이 매우 강렬하고 종류도 다양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날뫼북춤(대구 2호)은 대구비산농악에서 북을 연주악기로 추는 북춤만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특유의 덧배기가락(굿거리장단)에 맞추어 덩덕궁이, 자반득이(반직굿), 엎어빼기, 다드래기, 허허굿, 모듬굿, 살풀이굿, 덧배기춤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미무을농악(경북 40호)은 쇠와 소고는 전원이 전립에 상모를 쓰고 이외에 배역들은 모두 백색의 큰 고깔을 쓰는데, 고깔의 꽃송이들은 춤사위에 따라 움직이게 한다. 길굿가락과 정적궁가락, 덧배기가락 등 경상도 특유의 쇠가락이 발달하였다. 경산보인농악(경북 41호)은 전형적인 모의농사굿 형식이면서도 다른 지역과 달리 글자놀이가 발달하였고, 섬세한 덩덕궁 가락과 삼채가락이 조화를 이루고, 특유의 별다드래기장단과 덧뵈기장단이 가락의 주를 이루어 화려하고 웅장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탈춤탈춤은 부산·경남지역 낙동강 하류에 7종목(야류·오광대)이나 국가 또는 지방무형문화재가 지정되었고 연희적인 면이 발달했으나, 대구·경북지역은 별신굿놀이 성격으로 재담이 적고 연희보다 의식성이 많은 하회별신굿탈놀음(국가 69호)과 예천청단놀음(경북 42호) 2종의 탈춤이 전승되고 있을 뿐이다. 별신굿이란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서낭)님에게 마을의 평화와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굿을 말하며, 더불어 수호신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하여 탈춤을 추었다. 하회별신굿탈놀음의 탈은 고려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1964년 하회탈 및 병산탈(10종11개)로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탈놀음의 반주는 꽹과리 중심의 풍물꾼이 하며 즉흥적이고 일상적인 동작에 약간의 율동을 섞은 춤사위로 이루어지는데 우리나라 탈춤의 기원과 전승을 밝히는 귀중한 자료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예천청단놀음은 대구·경북지역의 향토성을 보이면서 벽사진경을 추구하는 주술성과 상류층에 대한 풍자를 투박한 춤과 몸짓, 토속적인 가락에 실어서 전달하고 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키로 만든 큰 탈이 쓰인다는 점, 신령스런 동물이 부정을 물리치는 듯이 하는 동작과 춤에 커다란 부채모양의 주지판이 사용된다는 점 등의 특징을 지닌다. 소리춤안동놋다리밟기(경북 7호)는 안동지방에서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던 여성들만의 민속놀이로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공주를 데리고 안동으로 피난을 와 개울을 건널 때 마을의 부녀자들이 허리를 굽혀 다리를 놓았다는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놋다리밟기는 맨 앞에 노년부터 젊은 부녀자 순으로 수십 명의 여자들이 모두 허리를 굽혀 앞사람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고, 머리는 앞사람의 궁둥이 왼편에 대는데 마치 생선을 꿰어 놓은 듯한 모습이다. 시녀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공주가 등(다리 역할) 위를 밟고 지나가면 밑에 있던 사람들은 다시 행렬 맨 앞에 구부려 다리는 그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안동놋다리밟기는 모든 여성이 한데 모여서 노래를 부르며 즐기는 규모가 큰 향토오락으로 승부를 내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소리춤으로 호남의 진도 해남 등지에 강강술래가 있다면, 영덕지역에는 월월이청청(비지정)이 있다. 노래와 춤놀이에는 달람세, 절구세, 둥둥데미, 실감기 등의 소리춤이 전한다. 근대 춤 전승 인맥 1950년 6.25한국전쟁으로 부산·대구지역만 남게 된 정부는 일시적이나마 대구에 중앙국립극장(현재 대구 CGV한일극장으로 재건축)을 지정하여 수많은 예술인과 무용들의 공연이 집중되는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정소산 → 백년욱(대구 18호)정소산(호 小山, 본명 鄭柳色, 1904~1978)은 1900년대 신무용의 거센 바람 속에서 궁중춤에 대한 소중한 가치와 전통의 맥을 전승·보존하며 대구교방춤의 맥을 이어온 선구자이며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정소산은 대구출생으로 대구기생조합에서 김수희 조합장의 춤을 배운 후 17세(1921)에는 서울 대정권번에서 하규일(1867-1937)로부터 1923년 19세에 본격적으로 궁중춤을 배웠고, 1925년 23세 때에는 조선권번에 있던 대가 한성준(1874~1942)으로부터 승무를 배웠다. 『조선미인보감』(1918)에 보면 "예쁜(좋은) 이마와 발을 가졌으며 청랑한 음성으로 시조잡가를 하는 특징이 소개되고 있으며 부드럽고 착한 성품으로 처음 보아도 구면에 본 것 같고 행동과 말투가 구수하다”고 정소산의 인물과 성품을 묘사했다. 그리고 1926년 이후 고향 대구로 돌아와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가야금을 비롯한 춘앵무, 포구락 등 궁중정재와 살풀이춤, 승무, 장고, 법무 등을 가르쳤다. 제자 백연욱은 1955년 열 살이 되던 해 정소산의 문하에 들어가 스승이 타계할 때까지 함께하면서 정소산의 춤 세계를 체득했으며, 2015년 대구시 무형문화제 제18호 정소산류 수건춤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이 춤은 궁중춤과 민속춤이 결합된 독특한 형태의 수건춤으로, 처음 등장하여 먼저 절을 올리고 춤을 추는 궁중춤의 예법과 춤사위가 장중하고 단아하며 절제미가 있는 점이며, 춤이 전개됨이 따라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흥을 돋우는 민속춤의 요소도 함께 담고 있다. 박지홍 → 권명화(대동권번, 대구 9호), 최희선(달성권번)1911년에 대구조합과 뒤를 이은 대구권번의 악가무 지도사범으로 초빙되어 지도하던 강태홍(姜太弘,1893-1957)이 부산 등지로 떠나고 뒤를 이어 1920년대 후반 초빙된 이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판소리 명창 박지홍(朴枝洪, 1884,-1958)이었다. 박귀희(朴貴姬), 박초향(朴初香), 박동진(朴東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등이 판소리를 배웠다. 일제강점기 대구에는 대구기생조합(대구권번), 달성권번과 대동권번 세 곳이 있었다. 이때 1927년 문을 연 달성권번에서 박지홍이 창, 기악, 춤을 지도하였다. 1940년 전후로 설립된 대동권번 역시 기본 춤, 시조, 창 등을 공통과목으로 하고 춤으로는 입춤, 살풀이춤, 검무, 승무, 소고춤 등을 가르쳤다. 이러한 박지홍 권번 교육은 최희선, 권명화에게 계승되어 현재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춤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최희선(1929~2010)은 10세 후반 명인 박지홍에게 전통춤을 배웠고, 상경하여 1945년 장추화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웠다. 한영숙에게 전통춤을 사사받고 1950년 6.25 전쟁 이후 대구에 내려가 박지홍의 춤을 다시 배워 달구벌 입춤 명무로 유명하였다. 권명화는 1934년 경북 김천출생으로 6.25전쟁 중 피난간 대구에서 절집의 풍악소리에 사로잡혀 영남 최고의 풍류객 박지홍을 만나 1950년부터 사사받고, 그에게서 배운지 6개월 만에 대구극장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 박지홍 고전무용학원 강사가 되었다. 1995년 대구시 무형문화재 제9호 살풀이춤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권명화 살풀이춤의 특징은 수건으로 고(苦)매듭을 엮었다 푸는 살을 푸는 과정이 유일하게 담겨있고 영남교방춤과 덧배기 춤가락이 깃들여 있는 점이다. 그밖에 권명화가 전승하고 있는 춤은 승무, 입춤, 소고춤, 검무 등과 경산자인단오제(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의 여원무를 비롯하여 단오굿 일곱거리의 굿춤이 있고, 축원춤으로 산거리춤(방울과 부채), 지전춤, 선비춤(한량무), 바라춤, 선녀춤, 오방신장춤, 장군칼춤 등이 있으며 건들바위 치성굿’도 복원하였다. 김상규 → 최영자, 이숙재, 주연희, 박성실 등대구 현대무용을 존속케 하는 역사적 인물은 김상규(金湘圭, 예명 技波, 1922-1989)다. 김상규는 1931년 9월16일 대구극장에서 공연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보면서부터 무용에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법학공부로 판검사가 되겠다는 핑계를 대고 14세(1935)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와세다중학교를 다니면서 저녁에 이시이바쿠 연구소에 가서 신무용을 배웠으며, 1941년 와세다대학 문학부와 1943년 동경음악과를 수학해 다방면의 관심을 보여주었고, 1946년 10년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김상규는 1946년 귀국 후 바로 신무용연구소를 개소하였고, 1949년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하고 만경관에서 가진 그의 ‘김상규 신무용 발표회’가 대구지역에서 자생한 신무용의 첫 보급이라 할 수 있겠다. 1951년부터 김상규 무용발표회가 국립극장(키네마극장, 현 한일극장, 전쟁 중에 중앙국립극장이 대구로 옮겨짐)에서 자주 열렸다. 이처럼 해마다 작품 발표회를 하다 보니 논밭을 팔고 결국은 집까지 팔게 되어 셋방으로 전전하면서도 춤에 대한 열정은 더욱 높아졌다. 김상규는 무용인으로는 처음으로 1957년도 경상북도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1989년 작고할 때까지 100여 편의 작품을 안무하였다. 손꼽히는 제자로는 최영자, 백운향, 박덕남, 박덕순, 백년욱, 이숙재, 김상아, 주연희, 서진은, 장성자, 오애리, 정선자, 김예숙, 이명주, 박성실, 김미연 등이 있다. 여성들도 사회적 인식을 깨기 힘든 시절에 남성무용가로 대구의 현대무용을 개척하고 뿌리내리게 한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정막(정순영)과 김기전김상규와 별도로 대구 현대무용의 역사에 빠져서는 안 될 인물로는 정막(鄭漠, 본명 鄭淳永, 1928~2012)과 김기전(金起田, 1935~) 부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50년 무용교육에 뜻을 두고 원화여고에서 정막 무용연구소로 출발했다고 언급한다. 정막은 1947년 겨울, 서울 명동의 함귀봉이 설립한 조선 교육 무용연구소(문교부 인가)에 첫 발을 디딘 것이 무용예술의 입문이었고, 6.25사변을 통해 무용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으며, 1953년 부산극장 종군극작가단 신작무대에 <인어의 정설>로 출연하고, 그해 8·15경축무용제에 중앙국립극장(당시 대구)에서 송범, 김진걸, 이인범과 함께 출연하였다. 그리고 1954년 중앙국립극장(대구)에서 정막의 안무로 제1회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김기전은 1935년 동경에서 태어나 1950년 피난시절 이인범발레연구소에서 공부하고 1952년 임천수 국보오페라단에 1954년까지 단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7월 육군 군예대(KAS)에서 무용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8년 12월에는 경북무용협회가 결성되어 키네마에서 창립공연을 하였는데, 정소산, 정막, 최희선, 현학선, 박금슬, 문소조 등이 출연하였다. 1961년 대구바레아카데미를 창설하고 대구지역에서 현대춤과 발레를 교습하여 춤 인재를 양성하였다. 김기전은 국내 최초로 대구시립현대무용단을 설립하여 초대(1981~1988년) 안무자로 대구 현대무용계를 직업무용단으로 이끌어왔다. 정막은 춤 실연자이자 춤 연출자, 안무가로서, 그리고 춤 교육자, 이론가, 평론가로서 대구, 경북지역 춤문화의 구심체였다. 2000년에 이르러 (사)대구시민문화연구소를 차려 대구지역 춤문화를 비롯하여 시민문화 향상에 매진해온 일은 중앙중심의 무용편중에 대한 대항마이기도 하였다. 대구·경북지역의 춤 미래 대구·경북지역이 오랜 역사의 부침(浮沈)속에서도 영남춤의 보편적 특징, 영남 북부춤의 중심적 특징과 더불어 향토춤의 특징을 온전히 전승할 수 있었던 것은 유난히도 춤 신명이 많고 춤추기를 좋아하는 지역의 심성에서 비롯하였다고 본다. 20세기 초기에는 정소산, 강태홍, 박지홍, 김상규 등 춤 명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지역춤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고, 뒤를 이어 20세기 후반에는 최희선, 권명화(대구 9호), 백년욱(대구 18호) 등이 그 명맥을 이어받았다. 현대춤과 발레 역시 끝까지 지역을 지켜 온 김상규(안동대 교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지역출신 무용교수가 많은 것도 근원적으로 춤의 고장이기 때문이지만 김상규가 대학교수로 무용 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 대학 무용학과를 개설하고 춤세계를 개척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울로 진출한 이숙재(한양대 명예교수), 김복희(한양대 명예교수), 박인숙(한성대 교수), 백현순(한체대 교수) 등이 ‘춤의 고장’의 토양에서 성장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지역에서도 구본숙(영남대 명예교수), 박연진(대구 가톨릭대 명예교수), 임혜자(계명대 명예교수), 김현옥(계명대 교수), 장유경(계명대 교수), 김희숙(무용가), 박현옥(대구가톨릭대 교수), 김소라(대구가톨릭대 교수), 이화석(대구예술대 교수), 강정선(대구무용협회장), 김죽엽(한국무용가), 최두혁(계명대 교수), 오레지나(대구가톨릭대 교수), 채명(무용평론가), 김용철(섶무용단), 손윤숙(발레) 등과 수많은 무용가들이 대를 이어 대구·경북춤의 정신을 고양하면서 세계를 향해 매진하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춤의 인프라는 2015년 이래 매년 세계안무페스티벌(DICFe, Daegu International Choreography Festival)을 펼치며 세계적인 안무도시로 발전하는 초석을 다져 나가고 있다. 이병옥/전통예술 연구가, 용인대 무용학과 명예교수, 무용평론가 용인대학교 무용학과 교수로 25년간 재직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다 정년퇴임 종신 명예교수이다. 한국무용사학회와 한국동양예술학회, 한국공연문화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경기도와 서울 시문화재위원을 거쳐 현재 이북오도청 문화재위원이다. 1985년 객석 예술평론상을 수상, 무용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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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씨름 부활 원년, 강오단오장사 씨름대회’ 개최K-씨름 부활의 원년, ‘2023 강릉단오장사 씨름대회’에 K-씨름 혁신과 변화의 바람이 분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원하고 대한씨름협회가 주최하는 ‘2023년 강릉단오장사 씨름대회’가 20일부터 25일까지 강릉시 강릉단오제 행사장에서 열린다. 박보균 장관은 "강릉단오장사 씨름대회를 시작으로 K-씨름이 경쟁력 있는 대표 K-스포츠로 재조명되고, 기업 후원과 투자 여건 개선으로 K-스포츠산업을 견인하는 대표 브랜드가 되도록 짜임새 있고 임팩트 있는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6일간 강릉에서 펼쳐지는 각본 없는 역전의 드라마를 온 국민이 함께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밝혔다. 문체부는 2023년을 씨름 부활의 원년으로 삼고, 씨름의 매력과 경쟁력이 발현될 수 있도록 여러 정책적 아이디어를 담아 지난 1월 ‘K-씨름 진흥방안’을 발표했다. 핵심 추진과제 중 하나는 MZ세대를 포함한 모든 세대가 열광할 수 있는 재미있고 역동적인 씨름대회로 개편해 씨름을 K-스포츠의 대표 킬러 콘텐츠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문체부와 대한씨름협회는 이번 대회를 K-씨름 혁신의 초석으로 삼고 K-씨름을 K-컬처와 융합해 세련미와 역동성을 한껏 높였다. 김홍도의 ‘씨름도’를 3차원(3D)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구현해 제작한 영상콘텐츠로 조선시대 씨름판을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새롭게 구성한 선수 소개․등장 영상과 대진표 등 경기장 디스플레이와 대회 운영 프로그램에 다양한 K-콘텐츠를 탑재해 세련되고 품격있는 관람콘텐츠를 선보인다. 또한 풀엘이디(LED) 스크린 등 멀티미디어 기술을 구현한 생동감 있고 몰입도 높은 경기장을 조성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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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천년축제’ 강릉단오제 막 오른다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자 국가무형문화재인 강릉단오제가 오는 18일부터 25일까지 8일간 강릉 남대천 행사장 등에서 열린다.15일 강릉단오제위원회에 따르면 ‘단오, 보우하사’를 주제로 한 올해 강릉단오제는 ▲지정문화재 행사 ▲전통연희 한마당 ▲무대공연예술제 ▲국외 초청 공연 ▲경연대회 페스티벌 ▲청소년 어울림 마당 ▲단오체험촌 ▲신통대길 길놀이 ▲시민참여 한마당 ▲강릉무형문화유산대전 ▲민속놀이 ▲경축 문화예술 행사 ▲부대행사 등 13개 분야 66개 프로그램을 선보인다.보우는 ‘보살피어 도와주다’라는 뜻으로 강릉단오제를 통해 모두가 안전하고 편안한 일상을 누렸으면 하는 바람과 천년 역사를 지닌 강릉단오제를 보살피고 이어 나간다는 의지가 담겼다. 2만명 이상 참가하는 신통대길 길놀이는 강릉지역 21개 읍·면·동이 함께한다. 길놀이는 강릉대도호부 관아에서 출발해 옥천오거리, 금성로, 성내동 광장을 잇는 구간에서 펼쳐진다. 그리고 올해 처음으로 강릉단오제 행사장을 잇는 5개의 다리(섶다리, 창포교, 남산교, 잠수교, 월화교)를 활용한 스탬프랠리가 도입돼 새로운 즐거움을 제공한다. 강릉시 관광거점도시 육성 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100여 개의 단오 굿즈인 ‘오브젝트 단오’도 행사장에서 만나볼 수 있어 기대를 모으고 있다. 미래 세대의 주역인 청소년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마련됐다. 단오맞이 청소년 가요제와 청소년 댄스 페스티벌, 청소년 축제인 DYF(Dano Youth Festival), 단오클라쓰 등 청소년 참여 프로그램이 확대돼 어느 때보다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은율탈춤, 고성오광대, 이리농악 등의 품격 있는 공연들과 관노가면극, 강릉농악, 학산오독떼기, 사천하평답교놀이, 건금마을용물달기가 함께 한다. 관노가면극보존회와 시민들로 구성된 관노가면극 동아리팀은 돌아가며 지정문화재 행사인 관노가면극을 공연하는데, 강릉단오제의 하이라이트 장면 중 하나다. 음력 5월8일 송신제와 소제를 통해 신을 신의 세계로 돌려보내며 강릉단오제는 막을 내리게 된다. 강릉단오제보존회(회장:빈순애)가 주관해 진행하는 행사들로 문화재청에 등재된 12가지 지정문화재 행사가 단오 기간 진행된다. 신주빚기와 대관령산신제, 대관령국사성황제, 구산서낭제, 학산서낭제, 봉안제는 단오가 시작되기 전 음력 4월5일과 15일에 각각 열린다. 신께 바칠 신주를 만들어 음력 4월 보름 대관령에 올라 단풍나무에 깃든 신을 인간세상으로 모셔 오는 의식을 행하게 된다. 이어 음력 5월3일 국사성황신과 여성황신을 단오제단으로 모시는 영신제와 영신행차가 펼쳐진다. 국사성황신이 단오제단에 모셔지면서 본격적으로 단오제가 시작된다. 강릉의 각 기관과 사회단체장들이 매일 아침마다 단오제단에서 유교식 제사인 조전제를 봉행하며 강릉의 평안과 번영 및 풍년농사와 만선을 기원한다. 이어 6월21일부터 5일간 단오굿이 마련된다. 하회동참굿, 조상굿, 세존굿, 중잽이굿, 축원굿, 군웅장수굿, 심청굿, 성주굿, 지신굿, 산신굿, 손님굿, 천왕굿, 칠성굿, 제면굿, 지탈굿, 용왕굿, 꽃노래굿, 뱃노래굿 등 노래굿 15~19거리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최유진 강릉단오제위원회 홍보마케팀장은 "강릉단오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굿을 좀 더 친숙하게 감상하고 즐길 수 있도록 굿당을 행사장 중앙으로 옮겼고, 휴게공간 및 포토존, 야간 경관 조명도 확대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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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단오제·경산단오제…6월 전국 무형문화재 행사6월 한달간 ‘국가무형문화재 공개행사’와 ‘전승자 주관 기획행사’가 전국 각지에서 열린다.해마다 개최되는 ‘국가무형문화재 공개행사’는 무형유산의 대중화와 보전·전승 활성화를 위해 국가무형문화재의 원형을 실연하는 행사다. 6월에는 총 30건의 공연과 전시를 마련했다. 서울과 광주에서는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보유자들의 공연이 개최된다. 6월 9일 광주광역시 북구 문화센터에서 윤진철 보유자와 박시양 보유자가 연합해 판소리 적벽가를 선보인다. 이어 18일에는 서울 강남구 민속극장 풍류에서 김영자 보유자의 판소리 심청가와 김일구 보유자의 판소리 적벽가가 펼쳐진다. 민속 명절 중 하나인 단오(6월 22일)를 맞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된 △강릉단오제(성황제·서낭제·봉안제, 6월 3일), 영신제·조전제·단오굿 및 축제(6월 20~25일·강원도 강릉시)를 비롯해 왜적을 무찌른 한장군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축제를 여는 △경산자인단오제(6월 22~25일·경상북도 경산시)와 영광군의 민속축제로 400여 년을 이어온 △법성포단오제(6월 22~25일·전라남도 영광군) 등 각 지역의 단오제 행사도 차례로 개최된다. ‘전승자 주관 기획행사’는 전승자가 자유롭게 기획한 공연과 전시행사다.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된 종목들을 중심으로 총 22건의 공연과 전시가 펼쳐진다.먼저 민속극장 풍류에서는 △북청사자놀음(6월 1일)과 △판소리(6월 16일)를 준비했다. 서울 종로구 종묘 영녕전에서는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6월 11일)이 개최된다. 경기도 양주에서는 △양주별산대놀이(6월 24일), 강원도 강릉시에서는 △강릉농악(6월 3일)과 △강릉단오제(6월 10일)가, 제주도에서는 △제주칠머리당영등굿(6월 3일)이 개최될 예정이다. 서울과 광주에서는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보유자들의 공연이 개최된다. 6월 9일 광주광역시 북구 문화센터에서 윤진철 보유자와 박시양 보유자가 연합해 판소리 적벽가를 선보인다. 이어 18일에는 서울 강남구 민속극장 풍류에서 김영자 보유자의 판소리 심청가와 김일구 보유자의 판소리 적벽가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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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신협, 무형유산 전승자 34명 6억5000만원 지원문화재청(청장 최응천)은 신협중앙회와 함께 6월 12일 오후 2시 신협중앙연수원 대강당(대전 유성구)에서 전통문화의 계승을 위한 ‘국가무형유산 전승활동지원 후원약정식’을 진행한다.문화재청은 지난 2020년 11월 신협과 ‘문화재지킴이 협약’을 통해 처음 인연을 맺은 후 협약에 따라 ▲ 2021년에는 궁궐·왕릉에 전통전주한지를 활용한 창호지 6,700장(1억)을, 전국 70곳의 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에는 코로나방역을 위한 무인체온기 등(1억 5천만 원)을 지원하였다. ▲ 지난해 9월에는 한지장(괴산), 한산모시짜기(서천), 선자장(전주), 소목장(완주), 칠장(포천), 강릉단오제(강릉) 국가무형유산 6개 종목의 공방 등 전승공간 개선을 위해 내부 단장, 방음시설 확충, 음향기기 교체 등을 비롯한 각종 보수작업 비용을 종목당 2천만 원(상한)까지 지원하였다. 올해에도 국가무형유산 전승취약종목의 안정적인 전승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추가로 국가무형유산 전승자들 34명을 선정해 6억 5천만 원의 후원금을 지원할 예정이다. 지원 대상은 악기장, 조각장, 소목장, 궁시장 등 기능 17종목 + 발탈, 가곡, 가사, 서도소리 등 예능 5종목이다. 이로써 작년과 올해를 합친 신협의 지원 금액이 총 7억 7천만 원에 달하면서 국가무형유산 분야에 대한 기업 후원 규모로는 역대 최대이다. 이번 추가 지원을 위해 신협중앙회는 전국의 신협지역협의회와 함께 신협사회공헌재단을 통해 후원금을 조성하였다.이번 후원금은 전승 공방·교육장 등의 보수·정비·확장과 공방·공연장의 필요 도구·장비·재료 구입 등에 사용될 예정이며, 사업주관 및 기부금 운영은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 김종규)에서 수행한다. 이번 지원사업을 계기로 지역별 국가무형유산 전승자와 신협지역협의회와의 교류·협력을 통해 지역단위의 개별 지원 사업도 확대할 계획이다. 12일 개최되는 후원약정식에는 지원을 받는 국가무형유산 전승자, 신협중앙회 및 지역협의회장, 지자체, 문화유산국민신탁 등 약 150여명이 참여할 예정이며, 지역별 국가무형유산 전승자와 신협지역협의회 등이 함께하는 교류 시간과 전승지원 사업 소개, 후원약정 서명 등으로 진행된다. 축하공연으로는 신협사회공헌재단이 2021년부터 전통예술 발전을 위해 후원하고 있는 ‘전통한국음악예술원’ 학생들이 참여한다. 문화재청은 신협의 문화재지킴이 후원사업이 국가무형유산 사회공헌 분야의 모범적인 사례로 발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원할 계획이다. 또한 앞으로도 국가유산 분야의 다양한 정책을 운영하고, 지속가능한 민·관 협력(거버넌스)을 활성화하여 안정적인 전승기반을 조성해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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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문화재 '수영야류'의 형성과정현재 인류무형문화유산 ‘한국의 탈춤’은 18개 종목으로 구성된다. 송파산대놀이·양주별산대놀이·통영오광대·고성오광대·강릉관노가면극(강릉단오제)·북청사자놀음·봉산탈춤·동래야류·강령탈춤·수영야류·은율탈춤·하회별신굿탈놀이·가산오광대 등 13개의 국가무형문화재와 속초사자놀이(강원)·퇴계원산대놀이(경기)·진주오광대(경남)·김해오광대(경남)·예천청단놀음(경북) 등 5개 시도무형문화재이다. 수영야류(水營野遊)는 부산 남구 수영동에서 전승되어온 가면극으로,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 수영동 수영공원 내에 전수회관을 두고 있다. 경상남도 낙동강 동쪽의 해안지대인 수영, 동래, 부산진 등에서는 가면극을 '들놀음' 또는 '야류'라고 불렀다. 수영야류는 원래 수영(水營)이라는 지명을 붙이지 않고 '들놀음' 또는 '야류(野遊)'라고 불렀다. 구전에 따르면 수영야류는 약 200년 전 초계 밤마리(현재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 오광대의 영향을 받아 시작된다. 당시 수영에는 오늘날의 해군기지라 할 좌수영이 있었는데 그곳의 대장인 수사가 밤마리 대광대를 불러다가 탈놀이를 놀게 하였으며 후에는 군졸들이 배워서 계속 놀게 되었다고 전한다.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에 산신제와 함께 거행되어 그해의 만사형통을 빌었다. 탈놀이를 놀기 전에는 가장행렬, 즉 길놀이가 있었고, 지신밟기와 함께 며칠간 계속 되는 이 기간 중에 탈을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탈을 만들면 탈에 제사를 지내며 무사히 놀이를 마치기를 기원하였다. 일제가 집단적 집회를 금지함에 따라 1935년 전승이 단절되었다. 광복 이후 잠시 수영야류가 복원되었으나 지속되지 못하다가, 1960년대에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국가무형문화재 수영야류보존회와 국가무형문화재 '수영야류'의 형성과정, 유래, 연희 과장, 특성,가면 등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수영(水營)의 지역적 특성 수영(水營)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선조 때부터 지금의 해군 지역본부에 해당하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慶尙左道 水軍節度使營)이 현재의 수영구 수영동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원래 좌수영(左水營)의 준말로 폐영이 된 뒤에도 오늘 날까지 관아의 명칭을 줄여서 그대로 부르고 있다. 현재 수영이라고 할 때 좁게는 행정 구역상으로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지역이지만, 넓게는 수영동을 중심으로 인근의 망미동, 민락동, 광안동 일대를 포함하기도 한다. 수영지역은 장산과 금련산, 황령산, 배산이 있어 북풍을 막아주고 그 사이에 수영강이 남쪽을 향하여 수영만으로 흐르면서 넓은 평야를 이루고 있었다. 전형적인 배산 임수(背山臨水)의 형국으로 이런 지역은 취락을 이루기에 알맞은 곳이다. 더욱이 수영강 하류지역이 비옥하고 바닷물과 민물이 합수하는 수영만은 어자원이 풍부하여 일찍이 농업은 물론 수산업이 발달 할 수 있는 입지 조건 갖추고 있었다. 이런 생활 여건에서 이 지역 사람들은 일찍이 농경에 관계된 의식을 행하고 이에 따른 놀이들을 하여왔다. 수영야류는 문헌이나 증빙할 만한 물증 자료가 없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곳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좌수영수사가 군졸들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해 합천 초계 밤마리의 대광대(竹廣大)패를 데려다가 연희하게 한데서 비롯되었다고도 하고, 수영사람들이 큰 장터인 밤마리에 가서 보고 온 후에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밤마리는 낙동강변의 수로요지(水路要地)로 어염상선(魚鹽商船)이 정박할 수 있는 하항시(河港市)여서 합천, 의령, 초계 등지와 고령, 안동 그리도 전라도지방에서까지 왔다고 한다. 더구나 6월에는 대마(大麻)의 집산지로서 난장을 이루었으니 그야 말로 큰 장터로 약 300호의 대 취락지였다고 한다. 여기에 거상(巨商)들의 비호 아래 유랑 놀이패들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놀이패 중에서도 이른바 대광대 패가 죽방울 받기, 솟대놀이, 줄타기, 땅재주, 무동놀이, 요술 등의 곡예를 하여 관객을 모은 다음 탈놀음을 했을 것이다. 수영야류의 발생과 전파 과정 당시 탈놀음의 내용은 오방신장무, 중, 양반, 영노, 할미·영감, 사자무 등을 연희했다고 하는데 이 탈놀음의 내용이 경남, 부산 각지에 남아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야류가 밤마리에서 퍼졌다는 전파설은 일리가 있는 것이다. 1933년에 송석하(宋錫夏)는 「오광대 소고」에서 "오광대를 직접 포태(胞胎)한 것은 초계 밤마리의 「대광대」임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좌수영(동래군), 부산, 동래, 김해, 창원(마산), 통영의 오광대 급 야류, 이입계통(移入系統)이 모두 초계에서 원류(源流)를 시작하였다.” 라고 전제하고 구전파의 연대와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좌수영은 수영사람들이 초계에 가서 보고 와서 창설한 것이며[동래군 좌수영 최창복씨 담] 동래읍은 수영것을 본 받아 시작한 것이고 [동래군 읍내 이흥욱씨 담] 부산진은 동래·수영의 면(面)을 모방하여 시작했다고 하였다 [부산시 백종기씨 외 제시 담] 오광대 계열도 언급하고 있다. 김해(가락)는 동래 것을 참고로 하여 시작하였고, 창원은 초계 대광대에서 배운 것이며 통영은 창원제(制)에 의하여 만든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진주는 의령군 부림면 신반리 대광대에 의하여 창설 되었다고 하여 그 전파 과정을 정리하고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수영야류는 다른 오광대나 야류보다는 비교적 일찍 연희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밤마리의 유랑 연예단인 대광대 패의 연원(淵源)은 무엇인가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위해서 우리나라 가면극의 역사를 살펴서 대광대 패의 성격을 고찰하여 보면,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濊)의 무천 등과 같은 제천 의식시에 가면을 쓰고 놀았다는 기록은 없으나 삼국시대는 가면놀이가 보인다. 삼국사기 권 32악조에 우륵의 12곡 중 제8곡 사자기(獅子伎)는 바로 사자무인 것이다. 수나라나 당나라의 기악에 고구려의 무악이 고려기라 하여 들어있고,백제의 기악도 오나라에서 전수하여 7세기에는 일본에 전파한 사실(史實)은 1233년에 필사한 음악 서적인 「교훈초」 권4 기악조에 일본의 기악이 백제인 미마자(味摩子)가 가져온 무악이하 하였고, 또 1956년에 편찬한 일본의 연극 사전에도 기악은 고대의 외래예능이며 서기 612년 백제인 미마지가 귀화하여 일본에 전한 것이라는 기록에서 증명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가면극이 더욱 성연되었다.고려시대에는 신라에서 전승된 팔관회라던지 연등회, 나례(儺禮)에서 연행된 가무백희가 성행되는 가운데 이른바 산대잡극이 성립되었고, 교방가무희도 정리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산대잡극과 나례회가 전래되어 이른바 규식지희(規式之戲)와 광대소학지희(廣大笑謔之戱)에 배태(胚胎)되었던 무용이 가면극으로 인형놀이가 인형극으로 창(소리)이 판소리로 분화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인조에 들면서 산대와 나례 등의 도감에서 관장 실시하던 국가적 행사인 공의(公儀)가 경제난으로 쇠태하기 시작하였다. 때문에 도감에 예속되어있던 광대, 재인들은 생계의 위협을 받게 됨으로써 공의의 쇠태는 심해져서 현종 때에는 금령(禁令)을 내린바 있었고, 영조 20년에는 결국 정파(停罷)되니 전국의 광대들은 각기 생계를 위하여 개별적 활동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초계의 대광대패는 이러한 시대적 변천에 의하여 유착한 연예단일 것이다. 그렇다면 경남과 부산에 전파한 탈놀음은 산대도감에서 연희하던 광대들의 계통이라 할 것이니 수영야류는 산대도감 계통의 탈놀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전파 과정이나 그 지역적 특성에 따라서 과장(科場)의 설정, 배역 등이 달라지게 되며, 내용과 표현에서 차이가 생겼을 것으로 본다. 사자가무가 동래에는 없으나 수영에 있는 이유는 수영의 지세(地勢) 때문이라 전하는 따위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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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카, 운영위원회 위촉식 개최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가 6일 예술의전당 컨퍼런스홀에서 코카카 운영위원회 위촉식을 개최했다고 7일 밝혔다.코카카 운영위원회는 전국 문예회관에 종사하는 공연·전시·무대 분야의 전문가 18명으로 구성됐다. 이중 선출직 운영위원은 6명, 코카카 회장이 위촉하는 위촉직 운영위원은 12명이다. 임기는 2023년 3월 18일(토)부터 3년으로, 운영위원회는 기관 중·장기 계획에 대한 수립·시행과 코카카 사업의 효율적 추진을 위한 자문기구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이날 위촉된 운영위원은 △(서울·인천지회) 오효석 인천서구문화재단 문화예술진흥팀장, 김승미 강동문화재단 공연전시팀장 △(경기지회) 최미경 하남문화재단 문화사업팀장, 황희정 의정부문화재단 공연예술본부장 △(강원지회) 전인두 강릉단오제전수교육관 주무관, 현연아 춘천문화재단 공연기획팀장 △(대전·충청·세종지회) 박지연 음성문화예술회관 주무관, 유필조 대전 시립연정국악원 공연팀장, 홍상은 공주문화관광재단 공연기획팀장 △(대구·경북지회) 윤슬아 대구학생문화센터 공연담당 주무관, 박병준 대구서구문화회관 문화사업팀장, 조한익 안동문화예술의전당 공연기획팀장 △(부산·울산·경남지회) 서종호 김해문화재단 공연기획팀장, 김성모 해운대문화회관 주무관, 한상훈 함안문화예술회관 공연기획계장 △(호남·제주지회) 김수일 부안예술회관 주무관, 김임호 광주문화재단 시설 관리운영팀장, 서영길 고창문화의전당 공연기획담당이다.이번 위촉식에서는 이선아 마포문화재단 마포아트센터 공연전시팀장을 포함해 총 13명의 전임 운영위원들에게 감사장을 수여하는 시간도 마련됐다. 이승정 코카카 회장은 "코로나19의 여파로 대면 소통은 어려웠지만 공연, 전시 등 문화예술계에 불어닥친 어려움을 함께 해결하기 위해 전방위적으로 노력한 운영위원들에게 감사를 전한다”고 말했다.이어 이 회장은 신임 운영위원들에게 "운영위원회와 코카카는 실무적인 차원에서 협력하는 관계인 만큼 운영위원회의 위원장인 서영철 코카카 사무처장과 함께 지역 문예회관과 코카카가 상생하며 발전할 수 있는 다양한 담론을 만들어 달라”고 당부했다.코카카는 문예회관 상호 간의 협력 증진과 문화예술 진흥을 도모하기 위해 1996년 설립된 문화체육관광부 유관기관이다. 서울 예술의전당, 국립극장 등 전국 224개 문예회관을 회원기관으로 두고 있으며, 운영위원회 및 지회 사무국장 회의 등 다양한 실무 협의 기구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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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무형문화유산 '송파산대놀이' 전승활동과 과제 (2)인류무형문화유산 '탈춤'이 문화적 전통으로 공동체에 정체성과 연속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보호협약의 정신에 부합한다는 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탈춤'은 등장 인물의 성격을 과장·유형화한 탈을 쓰고 권력과 사회의 부조리·인간의 이중성 등을 적나라하고 신랄하게 풍자·비판하면서 관객의 동조·야유 같은 능동적인 참여까지 이끌어내 완성하는 적극적 소통 방식의 예술이기도 하다. 송파산대놀이는 서울시 송파구 송파동과 가락동 일대에서 전승되어온 가면극으로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 서울 송파구 잠실동 석촌호수 근처에 있는 서울놀이마당에 전수회관을 두고 있다. 놀이판은 주로 송파장 마당이었으며, 놀이마당은 장마당의 넓은 터에 둥글게 말뚝을 박고 새끼줄을 쳐서 원형의 야외무대를 만들고, 악사석에는 멍석을 깔고 광목 천막을 쳐 악사와 동네어른들의 자리를 마련했다. 그러나 1925년 7월 대홍수로 인해 송파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모래사장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주민들은 현재 가락동 일대로 이주해 살면서 한두 번 산대놀이를 거행했으나, 이내 전승이 단절되었다. 연희자 허호영(許浩永, 1914-1990)의 증언에 의하면, 송파에 거주하고 있던 허윤(許鈗, 1867-1935)이, 1900년부터 구파발 본산대놀이의 연희자 윤희중(尹熙重, 1840-1923)을 초빙하여 쇠진한 송파산대놀이를 재건했다고 한다. 그리고 1930년대 초부터 돌말이(석촌리)에서 한유성과 이범만 등이 송파의 윤종현에게 가면극을 전수받아 재건에 성공했다. 그 후 일제강점기 말에 단절되었던 돌말이의 산대놀이는 광복 이후 몇 차례 공연되었으나, 다시 전승이 끊겼다가 1960년대에 복원되었으며 1973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서울놀이마당 전수회관에서 전승되고 있다. 송파산대놀이는 오래 전에 채록된 대본이 없고, 1970년대에 들어와 복원되었기 때문에 대사에 현대적인 표현이 많다. 현재 연희 교재로 쓰이고 있는 송파산대놀이의 '이병옥본'연희본은 1975년에서 1980년까지 이병옥이 당시의 예능보유자인 이범만, 한유성, 문육지, 김윤택, 이충선의 구술을 토대로 채록한 연희본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간한 『송파산대놀이』(2006)에 수록되어 있다. Q. 인류무형문화유산 ‘한국의 탈춤’으로 등재된 ‘송파산대놀이보존회’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심사위원들이 어떤 부분을 중점으로 가치를 평가했는지요. A. 세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위원회는 ‘한국의 탈춤’이 강조하는 보편적 평등의 가치와 사회 신분제에 대한 비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는 주제이며, 각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에 상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 등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특히, 안건으로 올라간 총 46건의 등재신청서 중에서 ‘한국의 탈춤’ 등재신청서를 무형유산의 사회적 기능과 문화적 의미를 명확하게 기술한 모범사례로 평가하였습니다. Q. ‘한국의 탈춤’ 등재를 위해 언제부터, 어느 단체와 기관이 협력했나요. A. ‘한국의 탈춤’ 의 유네스코 등재는 10여년전 국가무형문화재 13개 탈춤단체인 대한민국탈춤단체 총연합회 출범 때부터 등재를 추진했던 것이지만 이번에 등재된 것은 민·관이 협력하여 국제사회에 우리의 전통문화를 알리는 쾌거를 거둔 좋은 사례입니다. 특히 문화재청과 외교부, 경북 안동시, 탈춤과 관련한 13곳의 국가무형문화재보존회와 5곳의 시도무형문화재 보존단체 및 세계탈문화예술연맹(IMACO)이 준비 과정에서부터 협력하여 이루어낸 성과입니다. Q 현재 인류무형문화유산 ‘한국의 탈춤’ 어떤 종목의 탈춤이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나요. A. '한국의 탈춤'은 모두 18개 종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양주별산대놀이·통영오광대·고성오광대·강릉관노가면극(강릉단오제)·북청사자놀음·봉산탈춤·동래야류·강령탈춤·수영야류·송파산대놀이·은율탈춤·하회별신굿탈놀이·가산오광대 등 13개의 국가무형문화재와 속초사자놀이(강원)·퇴계원산대놀이(경기)·진주오광대(경남)·김해오광대(경남)·예천청단놀음(경북) 등 5개 시도무형문화재입니다. Q. 현재 송파산대놀이 전승활동을 하는 회원의 구성원은 몇 분이신가요. A. 1973년 지정당시 6명이던 보유자가 1995년 이후 1명뿐입니다. 보유자를 늘리고 국가지원 확대가 필요합니다. 송파산대놀이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지만, 전승자가 줄어 위기를 겪는 현실은 여전하고, 현재 송파산대놀이에는 2006년 보유자가 된 함완식, 지난 7월 명예보유자가 된 이병옥을 비롯해 전승교육사(안병인, 김명하, 이수환, 이영식, 강차욱) 5명, 이수자(전수교육을 마친 자)20명, 전수자(전수교육을 받는 자) 26명이 있다. 이 중 현재 활동 이수자는 11명, 전수자는 23명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보유자가 하나 둘 사망하면서 1994년 이후 송파산대놀이 초기 보유자는 한명도 남지 않았다가 1995년 5월 김학석(1940~2014)이 보유자로 인정을 받았지만 작고하여 현재 송파산대놀이 보유자는 함완식 1명에 불과합니다. Q. 왜 보유자를 늘리지 못하나요. A. 문화재청이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니지만 들리는 바에 의하면 단체 몇몇 사람을 보유자로 인정하는 데 따라 전승자 간에 불화를 조성할 수 있고 예산 관계상 다수의 보유자 인정이 어려워 단체 성격별로 주된 기능을 보유한 자를 1~2명 이내에서 두기로 내부적인 방침이 정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보존단체의 시각은 다릅니다. 보유자를 1명 이내로 두게 되면서부터 내부갈등은 더 첨예해졌고 인정되지 못한 전승교육사들은 자괴감에 빠져있고 이수자나 전수자들은 미래희망을 잃고 전승활동을 중지하고 떠나는 사례가 더 많아져 회원수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리하여 몇 개의 인기있는 개인종목을 제외한 단체종목 대부분이 전수자가 많이 줄어들고 있으며 송파산대놀이도 언제까지 존속할지 걱정이 크죠. 전수자뿐만 아니라 보유자가 돼도 탈춤으로 생계유지가 안 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거리입니다. 국가 지원이 열악할 뿐만 아니라 공연으로 먹고 살기도 힘들다고 하는 제자들을 볼 때가 가슴 아프죠. 겨우 1년에 한번 정기 공연하는 것과 운영비 정도 받는 게 전부죠. 더구나 요즘에는 젊은이들은 살기 어렵다고 잘 오지 않는 현실이고, 초등학생 때부터 가르쳐도 중학교 2학년을 마치는 순간 안 나와요. 대학 입시에 도움이 안 되니 부모들이 아무도 자기 자식을 보내지 않는 거죠. 예능을 가장 감수성 있게 받아들이기 쉬운 때를 놓쳐버리고 마는 거죠. Q. 명예보유자는 공식적으로 받는 어떤 혜택이 있나요. A. 또 하나의 문제는 명예보유자에 대한 시각과 대우입니다. 명예보유자는 전수활동에서 은퇴하는 것으로 전수의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양성이나 전수자 교육을 인정받지 못해 해당종목 이수자 추천이나 신청을 할 수 없는 직함입니다. 평생을 몸 받쳐 전승활동을 했는데 명예보유자가 되는 순간 뒷방노인으로 전락하는 구조입니다. 따라서 보유자가 건강이 악화되어 전수활동을 못해도 명예보유자로 가지 않으려 하는게 현실입니다. 그 이유 중에 중요한 것은 보유자가 10년전에 120만원을 받았으나 조금씩 인상되어 현재 150만원이 되었고 전승교육사는 50만원에서 현재 90만원으로 인상되었지만, 명예보유자는 전승비도 특별지원금이라하여 10여년 전에 지급하던 100만원이 10년이 지나도 한푼도 인상하지 않고 그대로 현재도 100만원입니다. 대를 이어 면면이 이어 온 전통문화는 본연의 가치가 있으며 이를 지키기 위해 평생 동안 천착 해 온 원로(보유자)들은 말 그대로 살아있는 인간문화재입니다. 그런데도 존재 이상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전수활동 의무만 강조하는 시각은 속히 바로 잡아야할 대목입니다. 일부 원로들은 지병과 노환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서 명예를 지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가족과 제자들의 짐만 안겨주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이수자들이 살기위해 생업을 택하고 떠나가는 추세입니다. 계승하는 제자들이 없어서 일년에 소멸되는 문화유산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국가에 평생 봉직하고 퇴임한 분들에게 지급하는 연금도 물가상승에 따라 매년 조금씩이나마 인상지급하는 형평성에도 위배되는 것입니다. Q. 해방이후 탈춤이 가장 활발하게 전승활동이 이루어진 때는 언제인가요 A. 1970~80년대는 대학 탈춤패가 성행하던 때였습니다. 대학마다 문전성시를 이뤄 전수관에도 엄청 나게 몰려왔어요. 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강사를 초청하여 이수자들을 여러 대학에 파견하여 산대놀이 탈춤강습을 집중시켜 탈춤발표회를 가졌고 지방대학까지 전수활동을 펼쳤습니다. 그 당시는 정신없었죠. 20여년 동안 활발한 전승이 이뤄졌다고 봅니다. 1975년부터 1983년까지 전수장학생 25명 중 5년간의 교육을 마친 18명이 이수자가 됐고, 1986년에는 전수교육 대상이 전수장학생뿐만 아니라 전수장학생 연령을 초과한 일반전수생까지 확대됐습니다. Q. 전승활동 기간 중 외부의 원인으로 전환기나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나요. A. 대학 탈춤패가 일부 운동권 학생이 중심이다 보니 탈춤 추는 사람들을 모두가 색안경을 끼고 봤죠. 당시 탈춤 배우러 가면 경찰에서 조사가 나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1990년대 이후 점차 배우러 오는 사람이 줄었습니다. 대학가에서도 탈춤외에 풍물, 민요 등 다른 전통문화를 배우려는 풍토가 생겨나면서 전수자가 줄어들었고, 다양한 문화향수와 개인취향의 대중문화와 현대문화에 관심이 높아지는 2000년 밀레니엄시대를 맞이하게 되면서 젊은이들이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이나 태도가 점차 약해져 간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IMF 이후 경제적인 문제가 더욱 현실적으로 두드러지는 시대를 맞이하자 젊은 전승자들은 생계를 위해 더욱 줄어들고 있는 현실입니다. 일부 종목이나 보존 단체에서는 기예능 보유자가 세상을 떠나고 전승하는 제자가 없어서 소멸되어가고 있는 것이 무형문화재의 실정입니다. 우리 고유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는 한편, 유네스코 무형유산보호협약에 따라 문화다양성과 인류 창의성 증진에 기여하기 위해 지속적 관심과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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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무형문화유산 '송파산대놀이' 전승활동과 과제 (1)지난해 11월 모로코에서 개최 한 제17차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무형문화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탈춤(Talchum,Mask Dance Drama in the Republic of Korea)’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 유산대표목록(Representative List of the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으로의 등재가 되었다.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 '한국의 탈춤'은 대일항쟁기 기간에는 일제의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법제적 금압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확산과 농민층의 분해로 잠시 농촌공동제의 전승력과 활동이 희박하게 되어 점차 탈춤의 존재양상도 변화하게 되었다. 한민족 고유 정서를 표출하는 민속이 일제의 외압으로 침체기를 맞이하게 된다. 해방후 1950년대 후반 다시 복원되기 시작한 송파산대놀이는 1973년 11월 국가무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됐다. 탈놀음 12마당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고 32개 탈 중 신할미, 신할애비, 포도부장, 무당 등 송파산대놀이에만 쓰이는 탈이 4개나 있다. 당시 연희자 5명과 악사 1명 등 6명이 보유자(인간문화재)로인정받았다. 202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한국의 탈춤'이 등재된다. 이번 등재로 우리나라는 총 22건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송파산대놀이보존회'는 매년 국내외에서 지속적으로 공연을 해 오고 있다. 또한 청소년, 지역주민, 소외계층을 위한 교육, 체험 활동도 펼치고 있다. 작년까지 보존회 살림을 해온 이병옥 회장에게 그동안 전승활동에 대해 들어본다. Q. 인류무형문화유산 '한국의 탈춤'으로 등재된 '송파산대놀이보존회'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심사위원들이 어떤 부분을 중점으로 가치를 평가했는지요. A. 세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위원회는 "'한국의 탈춤'이 강조하는 보편적 평등의 가치와 사회 신분제에 대한 비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는 주제이며, 각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에 상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 등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특히, 안건으로 올라간 총 46건의 등재신청서 중에서 '한국의 탈춤' 등재신청서를 무형유산의 사회적 기능과 문화적 의미를 명확하게 기술한 모범사례로 평가하였습니다. Q. '한국의 탈춤' 등재를 위해 언제부터, 어느 단체와 기관이 협력했나요. A. '한국의 탈춤'의 유네스코 등재는 민·관이 협력하여 국제사회에 우리의 전통문화를 알리는 쾌거를 거둔 좋은 사례입니다.문화재청과 외교부, 경북 안동시, 탈춤과 관련한 13곳의 국가무형문화재와 5곳의 시도무형문화재 보존단체 및 세계탈문화예술연맹이 준비 과정에서부터 협력하여 이루어낸 성과입니다. Q. 현재 인류무형문화유산 ‘한국의 탈춤’은 어떤 종목의 탈춤이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나요. A. ‘한국의 탈춤’은 모두 18개 종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양주별산대놀이·통영오광대·고성오광대·강릉관노가면극(강릉단오제)·북청사자놀음·봉산탈춤·동래야류·강령탈춤·수영야류·송파산대놀이·은율탈춤·하회별신굿탈놀이·가산오광대 등 13개의 국가무형문화재와 속초사자놀이(강원)·퇴계원산대놀이(경기)·진주오광대(경남)·김해오광대(경남)·예천청단놀음(경북) 등 5개 시도무형문화재입니다. Q. 현재 송파산대놀이 전승활동을 하는 회원의 구성원은 몇 분이신가요. A. 6명이던 보유자가 1995년 이후 1명뿐이다. 보유자 늘리고 국가 지원 확대 필요합니다. 송파산대놀이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지만, 전승자가 줄어 위기를 겪는 현실은 여전하고. 현재 송파산대놀이에는 2006년 보유자가 된 함완식, 지난 7월 명예보유자가 된 이 회장을 비롯해 전승교육사(전수교육을 하는 자) 5명, 이수자(전수교육을 마친 자) 20명, 전수자(전수교육을 받는 자) 26명이 있다. 이 중 이수자는 11명, 전수자는 23명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보유자가 하나둘 사망하면서 1994년 이후 송파산대놀이 보유자는 한명도 남지 않았습다. 이후 1995년 5월 김학석(1940~2014)이 보유자로 인정을 받았지만, 송파산대놀이 보유자는 1명에 불과합니다. Q. 왜 보유자를 늘리지 못하나요. A. 단체 몇몇 사람을 보유자로 인정하는 데 따라 전승자 간에 불화를 조성할 수 있고 예산 관계상 다수의 보유자 인정이 어려워 단체 성격별로 주된 기능을 보유한 자를 1~2명 이내에서 두기로 국가 방침이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전수자가 많이 줄어 송파산대놀이가 언제까지 존속할지 걱정이 크죠. 전수자뿐만 아니라 보유자가 돼도 탈춤으로 생계유지가 안 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거리입니다. 국가 지원이 열악할 뿐만 아니라 공연으로 먹고 살기도 힘들다고 하는 제자들을 볼 때가 가슴 아프죠. 겨우 1년에 한번 정기 공연하는 것과 운영비 정도 받는 게 전부죠. 인간문화재가 매달 국가에서 받는 150만원으로는 생계유지도 힘들어요. 더구나 요즘에는 젊은이들도 잘 오지 않는 현실이고.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 때부터 가르쳐도 중학교 2학년을 마치는 순간 안 나와요. 대학 가는 데 도움이 안 되니 부모들이 아무도 자기 자식을 보내지 않는 거죠. 예능을 가장 감수성 있게 받아들이기 쉬운 때를 놓쳐버리고 마는 거죠. Q. 해방이후 탈춤이 가장 활발하게 전승활동이 이루어진 때는 언제인가요 A. 1970~80년대는 대학 탈춤패가 성행하던 때였습니다. 대학마다 문전성시를 이뤄 전수관에도 엄청나게 몰려왔어요. 그 당시 정신없었죠. 20여년 동안 활발한 전승이 이뤄졌다고 봅니다. 1975년부터 1983년까지 전수장학생 25명 중 5년간의 교육을 마친 18명이 이수자가 됐고. 1986년에는 전수교육 대상이 전수장학생뿐만 아니라 전수장학생 연령을 초과한 일반전수생까지 확대됐습니다. Q. 전승활동 기간 중 외부의 원인으로 전환기나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나요. A. 대학 탈춤패가 대부분 운동권 중심이다보니 탈춤 추는 사람들을 모두가 색안경을 끼고 봤죠. 당시 탈춤 배우러 가면 경찰에서 조사가 나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1990년대 이후 점차 배우러 오는 사람이 줄었습니다.(계속) 한국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현황은 종묘 제례악(2001), 판소리(2003), 강릉 단오제(2005), 강강술래, 남사당놀이, 영산재, 제주칠머리당영등굿, 처용무(2009), 가곡, 대목장, 매사냥(2010), 택견, 줄타기, 한산모시짜기(2011), 아리랑(2012), 김장문화(2013), 농악(2014), 줄다리기(2015), 제주해녀문화(2016), 씨름(남북공동, 2018), 연등회(2020), 한국의 탈춤(2022)이다. 그러나 전승활동을 위한 현실은 많은 과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 이 중 가장 안타까운 것은 젊은 계승자가 생계를 위해 줄어들고 있는 현실이다. 일부 보존 단체에서는 기예능 보유자가 세상을 떠나고 전승하는 제자가 없어서 소멸되어가고 있다. 우리 고유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는 한편, 유네스코 무형유산보호협약에 따라 문화다양성과 인류 창의성 증진에 기여하기 위해 지속적 관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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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강원분원 강릉 건립 가시화국립국악원 강원분원의 강릉 건립이 가시화되고 있다. 14일 김영운 국립국악원장을 비롯한 국악원 관계자들이 강릉을 방문해 김홍규 강릉시장과 강릉분원 설치를 위한 논의를 하고, 건축 후보 예정지 3곳을 시찰했다. 강릉시의 국립국악원 강릉분원 설치는 민선8기 강릉시정 공약이자 핵심현안으로 올해 정부예산에 국립국악원 강원분원 건립 연구용역비 2억원이 반영되면서 사업 추진에 탄력을 받게 됐다. 김영운 국립국악원장은 교통 편의성 및 도심 접근성, 주차공간 확보 등을 중점적으로 고려하기 위해 직접 현장을 찾았다고 설명했다. 김홍규 시장은 "국립국악원 강원분원을 위한 좋은 부지들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으며, 타 분원과 차별화된 무형유산으로 발전하도록 적극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앞서 시가 수행한 설립 타당성 용역 결과에 따르면 국악원 강원분원은 연면적 6,117㎡에 지상 4층, 지하 1층, 공연장 700석 규모로 건립 시 총사업비가 450억원 가량 소요될 전망이다. 시는 국립국악원 강원분원 건립 연구용역을 8월까지 마치고 올 하반기 기본·실시설계에 착수하도록 국비 확보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향후 강릉분원은 전 국민의 국악 놀이터 제공을 위한 자립형 국악원으로 설립될 예정이다. 다양한 콘텐츠 발굴 및 육성, 체험형 플랫폼까지 구축해 특성화 및 차별화 시킨다는 구상이다. 분원 건립은 강릉단오제, 강릉농악 등 지역 국악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고, 2026 ITS 세계총회 등 각종 국제행사에서 국악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등 지역 전통문화 활성화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강릉시는 지난해 11월 23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2023년도 정부 예산에 '국립국악원 강원분원 건립 연구용역비' 2억 원이 반영돼, 문화체육관광부가 관련 용역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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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시립이담농악단, 양금과 만난 사물 '노리' 초연19일 오후 7시 동두천시민회관 대공연장에서 동두천시(시장:박형덕)가 주최하고 동두천시립이담농악단(단장:김경수)이 주관하는 열다섯번째 동두천시립이담농악단 정기공연이 개최된다. 프로그램에는 '술술탈탈 무탈하다'의 주제로 탈춤(김문경), 반주에는 가야금병창 하태현, 장구 황진하가 첫막을 연다. 두번째 무대는 사물(김경수)과 양금(박은수) 콜라보레이션 ‘노리’, 세번째는 무을농악 쇠놀이(박정철), 네번째는 줄놀음(박회승), 휘날레는 동두천시림합창단(지휘자: 김진수)이 함께한다. 특히 이번 공연에서 사물과 양금이 만나서 콜라보레이션으로 연주되는 '노리'가 초연된다. 노리는 경기북부 웃다리 농악 가락에 양금 편성을 더하여 새롭게 작곡해 낸 곡이다. 김경수 음악감독은 "세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농악의 세계화'를 위해 여러 장르의 음악과 만나서 실험적 음악 제작을 위해 기획했다. 세계적 양금 연주자이며 작곡가 윤은화의 협업으로 제작되었다. 이담농악의 대표 가락인 '쩍쩍이-칠채-육채-마당삼채-짝쇠' 가락에 남북한 배합악기 '양금'을 더하여 사물과 양금의 콜라보레이션을 시도해 보았다. 이번 정기공연을 통해 초연하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노리'는 이담농악의 대표적인 가락인 칠채를 바탕으로, 이담농악 보유자인 꼭두쇠 김경수의 특색있는 열채 소리와 양금만의 고유한 음색을 결합한 '칠채', 각 악기들의 주고받기 구성에 양금을 포함한 '육채', 상쇠와 부쇠가 이끌어나가는 가락을 양금으로 대체한 '짝쇠' 장단으로 이루어져있다. 연주에는 이담농악단의 곰뱅이쇠인 박은수 연주자가 직접 양금을 사사받고 양금 연주자로 참여하였으며, 김경수 단장과 고양옥 곰뱅이쇠, 김해민 · 최영호 뜬쇠가 사물 연주를 담당하였다. 동두천시립이담농악단은 꼭두쇠 김경수(동두천시 무형문화재 제3호 '이담농악' 보유자)를 주축으로 한국 전통예술의 계승 발전과 지속적인 무대화 작업을 통해 대중화에 기여하기 위한 공연 전문 단체로 1995년 이담풍물놀이보존회로 활동을 하다 2007년 11월에 동두천시를 대표하는 동두천시립이담농악단이 창단되었다. 총 25명의 시립단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내외 전통연희 및 경기 북부를 대표하는 문화 사절단으로 일본, 미국, 영국 런던, 캐나다 밴쿠버, 러시아 등 국내외 주요 공연 700여 회를 주도한 경기 북부를 대표하는 농악단이라 할 수 있다. 2019년 전주대사습놀이 장원(국무총리상), 2022년 임방울 전국농악경연대회 (국회의장상) 등을 수상하였다. 한편 김경수 단장은 성산효대학원대학교 효예술융합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동두천이담농악 전승과 방향'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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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됐다풍자와 해학이 어우러진 전통 가면극 '한국 탈춤'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정식 명칭은 '한국의 탈춤'(Talchum, Mask Dance Drama in the Republic of Korea)이다. 유네스코는 30일(현재 시간) 모로코에서 열린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에서 '한국 탈춤'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최종 등재키로 결정했다.현재 한국은 21종목의 인류무형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이날 '한국 탈춤'의 최종 등재가 결정되며 한국은 22종목의 인류무형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위원회는 '한국의 탈춤'의 등재 여부를 심사한 뒤 "탈춤은 구전 전통과 공연예술 그리고 춤, 음악, 연극과 같은 전통을 비롯해 탈을 만드는 전통기술 등을 통해 표현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보편적 평등의 가치와 사회적 신분제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데 오늘날에도 유효한 것"이라며 "각 지역의 문화 정체성 측면에서도 상징적인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고 평가했다.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는 '한국 탈춤'이 강조하는 보편적 평등의 가치와 사회 신분제에 대한 비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는 주제며, 각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에 상징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 등을 높이 평가했다.특히, 안건으로 올라간 등재신청서 46건 중 '한국 탈춤' 등재신청서를 무형유산의 사회적 기능과 문화적 의미를 명확하게 기술한 모범사례로 평가했다. 지난 1일 정부간위원회 산하 평가기구는 '한국 탈춤' 심사에서 '등재' 권고 판정을 내렸다. '한국 탈춤은 춤, 노래, 연극을 아우르는 종합예술로, 관객과 적극적인 환호와 야유를 주고받으며 비판할 것은 비판하되 크게 하나 됨을 지향하는 유쾌한 상호 존중의 공동체 유산이다. 이번에 등재된 '한국의 탈춤'은 국가무형문화재 13개와 시도무형문화재 5개로 구성돼 있다. 국가무형문화재로는 양주별산대놀이, 통영오광대, 고성오광대, 강릉단오제 중 관노가면극, 북청사자놀음, 봉산탈춤, 동래야류, 강령탈춤, 수영야류, 송파산대놀이, 은율탈춤, 하회별신굿탈놀이, 가산오광대 등이 있다. 시도무형문화재는 강원무형문화재 속초사자놀이, 경기무형문화재 퇴계원산대놀이, 경북무형문화재 예천청단놀음, 경남무형문화재인 진주오광대와 김해오광대 등이다. 이로써 한국은 총 22건의 인류무형무화유산을 가진 국가가 됐다. 우리나라는 2001년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을 시작으로 판소리, 강릉 단오제, 강강술래, 남사당놀이, 영산재, 제주칠머리당영등굿, 처용무, 가곡, 대목장, 매사냥 등 21건의 인류무형문화유산을 보유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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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탈춤,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된다가무와 연극성의 종합예술로 평가받는 ‘한국의 탈춤’이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오르게 된다. 문화재청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Representative List of the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으로등재 신청한 ‘한국의 탈춤’이 1일 오전 8시(현지시간 31일 오후 12시) 공개된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 산하 평가기구(Evaluation Body)의 심사결과, ‘등재 권고’ 판정을 받았다.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 산하 평가기구는 이번에 총 46건의 대표목록 등재신청서를 심사하여 우리나라의 ‘한국의 탈춤’을 포함해 총 31건에 대해서 ‘등재’를 권고했고, 14건에 대해서는 ‘정보보완’을 권고했으며, 1건에 대해서는 ‘등재 불가’를 권고하였다. 전 세계 전문가 6인과 비정부기구(NGO) 관계자 6인으로 구성된 심사단은 1일 공개한 결정문에서 탈춤에 대해 "탈춤은 구전으로 전해진 공연예술로, 음악·춤·연극을 포함하는 전통에 더해 탈을 만드는 장인의 예술정신도 연관되어 있다”며 탈춤의 현재적 전승 및 '지속 가능성'에 대해 평가했다. 한국의 탈춤이 이번에 ‘등재 권고’를 받게 되면서 오는 11월 28일부터 12월3일까지 모로코 라바트에서 개최되는 제17차 무형유산보호 정부간위원회의 최종 결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이번 결과는 유네스코 누리집을 통해서 공개되었다. 또한, 평가기구는 ‘한국의 탈춤’등재신청서를 대표목록 등재신청서 중 모범사례(Good Example)의 하나로 제시하며 대한민국의 ‘한국의 탈춤’등재신청서는 특정 무형유산의 대표목록 등재가 어떻게 무형유산 전체의 중요성에 대한 가시성과 인식을 제고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잘 준비된 신청서로 평가하였다. 평가기구는 신청된 유산을 등재, 정보보완(등재 보류), 등재 불가로 나눠 위원회에 권고하는데 등재 권고 판정이 거부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나라 탈춤과 관련해서는 한국의 무형유산 제도가 도입된 1960년대부터 비교적 이른 시기에 국가무형문화재 목록에 포함된 탈춤은 한국 국민들에게 전통적 공연예술 및 무형유산의 상징으로 인식돼 왔다. 현재 13개의 국가무형문화재와 5개의 시도무형문화재 종목이 지정돼 있다. 국가무형문화재로는 양주별산대놀이, 통영오광대, 고성오광대, 강릉단오제 중 관노가면극, 북청사자놀음, 봉산탈춤, 동래야류, 강령탈춤, 수영야류, 송파산대놀이, 은율탈춤, 하회별신굿탈놀이, 가산오광대 등이 있다. 시도무형문화재는 경기무형문화재 퇴계원산대놀이, 경북무형문화재 예천청단놀음, 경남무형문화재인 진주오광대와 김해오광대, 강원무형문화재 속초사자놀이 등이다. 현재 한국은 21종목의 인류무형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한국의 탈춤’이 최종 등재가 되면 총 22종목의 인류무형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2001년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을 시작으로 판소리(2003년), 강릉 단오제(2005년), 강강술래, 남사당놀이, 영산재, 제주칠머리당영등굿, 처용무(2009년), 가곡, 대목장, 매사냥(2010년), 택견, 줄타기, 한산모시짜기(2011년), 아리랑(2012년), 김장 문화(2013년), 농악(2014년), 줄다리기(2015년), 제주 해녀 문화(2016년), 씨름(2018년), 연등회(2020년) 등 21건의 인류무형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북한의 '평양랭면풍습 Pyongyang Raengmyon custom'도 이번에 등재를 권고 받았다. 북한은현재 아리랑(2014년), 김치담그기(2015년), 씨름(2018년/남북공동등재)가 있으며 이번 등재로 인해 총 4종목의인류무형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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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무형문화유산 눈으로, 귀로, 가슴으로 공감!지난 9월 24일(토) 서울시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열린마당. 공연장 세트 뒤로 넓게 펼쳐진 가을하늘은 세트와 어우러져 마치 하늘 가까이에 있는 듯하다. 스치는 바람은 이 시간 예술과 자연을 함께 느끼고 있음에 황홀함마저 느끼게 한다. 예매한 관객들은 제공받은 종이팩 포장의 물과 친환경 재료(나무)로 만든 칫솔을 제공받았다. 현장 관람 관객들도 합류하면서 객석은 모두 채워졌고, 딱딱한 돌계단 객석이 불편하지 않도록 폭신한 방석도 제공받았다. 9월 24-25일(토-일)의 주요 공연을 돌아본다. 매 공연마다 사회자는 공연에 대해 쉽고도 재미있는 해설을 해주어, 공연의 문턱을 한결 더 낮췄다. 진굿의 중심, 김천금릉빗내농악/ (사)김천금릉빗내농악보존회 인류무형문화재 농악. 그 중에서도 김천금릉빗내농악은 군사훈련에서 유래한 진굿(진, 陳:군사훈련 때 사용되는 줄 또는 열)이라는 특색을 가지며 국가무형문화재로(제11-7호, 2019년) 지정되기도 했다. 공연에 앞서 등장한 사회자(소리꾼 이상화)는 ‘김천금릉빗내농악’에 대한 설명과 함께, 농악대 중에 실제 농사일을 하시는 분도 계시다는 말도 덧붙인다. ‘진짜 농부의 농악을 2022년 서울 하늘에서 보다니.’ 농악대의 힘찬 꽹가리 소리로 공연은 시작되었다. 역시 군사훈련에서 유래한 농악답게 가락이 빠르고 역동적이다. 유난히 강한 북소리는 가슴을 울릴 정도다. 북잽이(대북 치는 사람)를 가만히 보니, 북채를 한 손이 아니라 양손에 쥐고 치고 있었다. 온몸의 힘을 양팔과 손에 집중하여 북채로 내리쳤기에, 그 소리가 듣는 이의 가슴까지 내리쳤던 것이다. 모든 잽이(농악대)들은 대열에 변화를 주거나, 상쇠의 힘찬 소리(노래), 그리고 역동적인 개인기로 관객들은 눈을 뗄 수가 없게 한다. 특히, 소고패가 채상소고춤 중 자반뛰기(높이 뛰어 도는 동작)를 선보일 때, 관객의 함성은 최고조에 달하며 분위기가 고조됐다. 농악의 최고의 순간이다. 삶을 예술로, 그리고 다시 공동체의 결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농악의 힘인 듯하다. 지칠 법도 하지만, 시종일관 웃는 표정을 보여주는 그들은(농악대) 과연 프로였다. 각시(흰 저고리, 검은 치마), 포수(사냥꾼 복장, 꿩과 총대 장착) 역할의 잡색(농악대의 흥을 돋우기 위해 가장한 사람) 또한 보는 재미를 선사했다. 공연 당일 새벽, 농악대와 함께 경북 김천에서 출발한 손영만 명인(김천금릉빗내농악 8대 상쇠)는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 "서울 분들 만난다는 생각에 마음이 부풀어서 지방에서 올라왔는데, 이렇게 관객 분들 크게 호응해주시니 너무 좋습니다.” 관객들은 눈앞에 펼쳐졌던 그 역동적이고 신났던 공연이 우리의 것임을 알기에 더한 감격을 느꼈을 것이다. 공연을 마치고 만난 한 가족(경기도 오산)은 이런 말을 남겼다. 엄마 "정말 신나고 감동적이었어요.” 아이 "완전 재미있었어요. 발로 돌 때.”(채상소고춤 중 자반뒤집기) 아빠 "우리 문화유산 잘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좋은 시간이었어요.” 부모는 농악을 실제로 처음 접한 아이가 농악대의 역동적인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은 것에 놀라워하면서도 매우 흡족한 표정이었다. 고풍(古風)/ 한누리무용단/ 극장 용 인류무형문화재 강강술래(2009), 처용무(2009)는 물론, 염불바라춤, 부채입춤, 진도북춤, 태평무(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등 전통무용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무대였다. 공연 전, 어린 아이들의 목소리도 여기저기서 들리지만, 공연이 시작되자 객석은 고요해진다. 커다란 달 아래 강강술래가 시작된다. 색색의 치마를 입은 무용수들은 버선발로 깃털 같은 춤사위로 빠르게 대열에 변화를 주며 부드러우면서도 역동적인 무대를 선사한다. 손, 팔, 다리의 움직임은 물결 같이 흐르며, 춤이란 과연 몸으로 말하는 예술임을 깨닫는다. 바라춤은 흰 장삼의 길게 늘어진 소매에서 흐르는 선의 아름다움과 느린 호흡으로 정교하게 박자를 맞춰가는 춤사위를 보여준다. 이후 빠르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바라를 치는 순간, 듣는 이는 바라 고유의 강렬한 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궁중에서 악귀를 몰아내고 평온을 기원하는 의미를 갖는 처용무. 처용탈을 쓴 5명의 무용수는 화려한 5방색의 복장을 갖추고, 절도 있고 절제된 동작을 보인다. 한삼 끝자락을 반대편 옆구리에 낀 채로 손을 앞으로 뿌리는 모습의 동작은 귀신을 몰아내는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느린 동작이기에, 인상적인 탈의 모습과 강렬한 동작이 분산되지 않고 함께 느낄 수 있었다. 비교적 빠른 박자의 진도북춤에서는 美·興·힘을 겸비한 여성 무용수들에게서 아이의 천진난만함과 강렬한 힘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군무 형태로 선보인 태평무는 궁중의복을 입은 무용수들의 부드러우면서도 빠른 발동작과 역동적인 춤사위가 인상적이다. 공연이 끝난 후, 그 아름다운 춤을 해낸 그들의 정중한 인사는 춤의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겸양에 또 한 번 감동받을 수밖에 없었다. 강릉단오제 단오굿/ (사)강릉단오제보존회 9. 25(일), 단오굿은 한 판 놀이에 가까웠다. 무녀(빈순애 명인,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 강릉단오제 기능 보유자)의 걸쭉한 입담은 만담을 방불케 할 정도로, 눈을 뗄 수 없이 집중하게 했다. 생산(출생)을 관장하는 신(神)인 세존과 당금애기의 결합과정을 그린 무속신화를 구연하는 무녀는 춤, 노래, 입담, 연기 어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이 관객을 사로잡는다. 무녀인지 예인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이다. 무녀와 악사들의 주고받는 능숙한 재담과 악사들의 익살스런 춤과 입담 역시 관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관객을 무대로 불러들이기도 하고, 이들이 관객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면서, 무대와 객석의 구분은 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자들은 신에게 관객들의 행복을 기원을 하는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잊지 않는다. 한껏 즐긴 관객들의 박수에는 감동과 감사를 담았을 것이다. 과거 무속과 불교문화의 관련을 보여주는 바라춤(악사 김운석)까지 볼 수 있는 귀한 공연이었다. 경북 경주에서 올라와 서울에 거주하는 딸과 국립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우연히 공연을 관람했다는 한 70대 여성 관객은 다음과 같이 소감을 밝혔다. "좋았어요, 너무. 다음에 또 보러 강릉에 가야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어렸을 적, 굿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때는 어린 마음에 강하고 무섭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오늘은 굿이라기보다는 사물놀이 같기도 하고, 문화공연 같은 느낌이었어요. 나이가 드니까 이런 것들이 정말 좋더라고요. 국악도 좋고, 한국무용도 배우고 싶어요.” 아리랑 리커넥티드/ 허윤정, 조스 미에니엘 외/ 극장 ‘용’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리랑(인류무형문화유산, 2012)과는 다른 색다른 아리랑을 경험하는 무대였다. 선보인 곡들은 (재)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에서 현대적 감성을 담은 아리랑을 대중과 공유하고자, 발표해 온 음반 <The Name of Korean> 시리즈의 8집 수록 곡들이다. 이날 공연은 아리랑 유네스코 등재 10주년을 기념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곡들은 외국 음악인들과 협업으로 이루어졌으며, 프랑스 플루티스트 조스 미에니엘(Joce Mienniel)이 공연에 함께 했다. 우리 악기와 외국 악기의 협연이 빚어내는 서정적인 멜로디로 아리랑 고유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곡에서부터, 코로나19 시기 힘든 시대의 우리를 위로하는 다소 실험적인 곡까지 아리랑의 다양한 음악적 변신을 경험할 수 있다. 무엇보다 마지막으로, 모든 연주자들이 한 무대에서 자신의 음악적 색채를 살리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협연은 음악이 박자를 만들어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곡이 인상적이었다. 진도아리랑을 부르는 소리꾼의 노래로 그 절정을 이루며 관객의 감동을 자아냈다. 시대를 초월하는 공감을 이뤄내던 아리랑이, 국경을 초월하는 음악적인 포용으로 그 창조성까지 발휘하는 무대였다. 이번 공연을 준비해온 (재)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심재흥 대외협력팀장은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혔다. "코로나로 인해서 오랜만에 관객 분들 모시고 하는 공연을 기획하게 되었는데요, 첫 날 첫 공연 시작 전에, 관객 분들의 환호를 들었을 때 가슴이 찡하더라고요. 공연은 역시 관객과 같이 해야 하고, 거기서 나오는 에너지가 또 다른 힘을 만들어 내는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고요. 저희도 이를 발판으로 삼아 내년에 더 좋은 프로그램으로 우리 전통문화, 더 많은 분들이 호응해주실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마지막 공연이 끝난 후, 거동이 불편한 노모를 양팔로 감싸 안고 부축하며, 자리를 나서는 나이 지긋한 중년의 남성의 뒷모습이 보였다. 초등학생 자녀들을 데리고 나서는 가족도, 모처럼 외출한 듯한 중년 여성들도, 그리고 두 손을 맞잡은 젊은 연인들도 보였다. 이 공연의 힘은 바로 이런 것이다. 다른 공연이 아닌 우리의 뿌리이자 삶을 아우르는 전통예술이기에 우리 모두를 한 자리에 모을 수 있었다. 오늘 그들이 경험한 전통은 누구에게는 향수가, 교육이, 추억이 되어 자신의 삶 속에 각기 다른 모습으로 파고들어 자양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년에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전통예술을 다시 만나게 될는지 기대해본다. 이번 공연은 11월 경, (재)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유튜브, 네이버TV를 통해 다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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